이혼·경제난 등으로 인한 가정 붕괴가 많아진 뒤 엄마·아빠 대신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손자녀가 함께 사는 '조손(祖孫) 가정'이 늘고 있다.
이들 가정은 경제적 여건이나 가정내 대화 환경 등이 모자가정 못지않게 열악한데도 사회적 지원 장치가 부족한 게 현실이다.
◇조손 가정의 사례들
박모(78·대구 성당동) 할머니는 5년 전부터 손자 이모(16·중2)군과 10대 외손자녀 3명을 돌보고 있다.
빚에 시달려 가정 불화를 겪던 며느리와 아들이 잇따라 가출하고 막내딸마저 비슷한 시기에 이혼했기 때문.
그 후 할머니는 곧바로 경제적 어려움에 부닥쳤다.
최근에야 생활보호를 받게 되긴 했으나 낡은 집이 한칸 있다는 이유로 그 동안은 국가의 지원도 없었다.
지금은 매월 30만원을 받지만 다섯 식구 생활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손자 이군은 장기 결석으로 휴학 조치되거나 친구들로부터 금품을 빼앗다 전학 당하기도 했다.
할머니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 자신도 지난 겨울 빙판에 넘어져 드러눕는 바람에 앞날이 막막하다고 했다.
오모(72·대구 대명동) 할머니는 12세, 13세짜리 외손녀 둘을 일년째 맡아 키우고 있다.
가끔씩 엄마가 아이들 얼굴을 보러 와도 형편이 어려워 쥐어주는 돈이라고 해야 기껏 용돈 정도. 아들이 있다고 해서 국가 지원 대상에서 제외돼 있지만 그 아들은 실직상태이다.
오 할머니는 최근 외손녀의 학교로부터 우울한 소식까지 전해 들었다.
집에서는 늘 고분고분하고 착한 큰 손녀가 친구들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조용한 성격의 우등생으로만 생각했던 작은 손녀는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걱정이 돌아왔다.
그 자신도 당뇨를 앓는 할머니는 "부양 받아야 할 나이에 되레 손녀들의 양육을 떠 안은 처지가 한탄스럽다"고 했다.
◇무엇이 어렵나?
조손 가정이라고 따로 분류해 지원하는 제도는 아직 마련돼 있지 않다.
잘해야 노인가정으로 지정될 수 있는 실정. 이럴 경우 국가는 소득과 가구원 숫자에 따라 매월 노인 1인당 생계비(양육비·피복비·주부식비·주거비) 3만~31만4천원 및 아동 1인당 6만5천원의 생계비를 지원한다.
여기에 별도로 받는 경로연금, 승차요금, 목욕비까지 합치면 총액은 50만원 가량 된다.
경제적 어려움이 무엇보다 앞선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그 못잖게 조부모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손자녀들을 제대로 키울 사회적 능력의 부족인 것으로 나타났다.
대구 남구사회복지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손 가정 조부모는 양육 정보(54.1%) 및 생활 상담(53.4%)이 부족하다고 응답했고, 손자녀 중 아동의 67.9%, 청소년의 52.1%가 방과 후 보호를 받지 못하며 진로, 또래 관계, 가정·학교 생활 적응(32.4%)에 고민이 많다고 했다.
이 복지관 임우현 팀장은 "조손 가정은 경제적인 곤란과 함께 먼 세대간의 낯설음이 주는 조부모 소외, 양육 능력 부재, 손자녀의 탈선 위험 등 복합적인 어려움에 처해있다"고 지적했다.
대구 대명4동 사회복지 담당 한보경씨는 "이들을 위한 특성화된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싹을 보이기 시작한 관심
이런 중에 최근 들면서 대구에서도 조손 가정 문제에 맞대응해 보려는 시도가 일부 이뤄지고 있다.
남구사회복지관이 지난달부터 시행 중인 '우리 가족 기(氣) 살리기' 프로그램이 대표적.
삼성복지재단 후원으로 올 11월까지 계속될 예정인 이 프로그램은 주 2회 조부모와 손자녀가 함께 참가하는 집단 상담, 월 2회 여는 손자녀 후견인 '멘토링(mentoring)', 월1회의 가족 행사 등으로 진행된다.
현재 참가 중인 사람은 10가정의 할머니 10명과 손자녀 12명.
조부모들은 집단상담을 통해 서로의 어려움을 나누고 지혜를 배울 수 있다고 복지관측은 전했다.
자신의 가정이 처한 상황을 바로 보고 의료서비스나 양육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상담사들이 돕는다는 것. 정무원(27) 사회복지사는 "조손가정 노인들은 남에게 차마 못 털어 놓던 고민을 비슷한 처지의 노인들과 나눌 수 있고, 이를 통해 자신감 회복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손자녀들은 자원봉사자들과 '멘터(mentor·후견인)' '멘티(mentee·피후견인)' 관계를 맺고 숙제 봐 주기, 야유회 및 영화 관람 같은 문화활동 등 조손가정에서 소홀하기 쉬운 활동 기회를 갖는다.
신은정(27) 사회복지사는 "다른 복지관들에서도 조손가정을 위한 유사한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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