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글로벌 분식(粉飾)회계 사태 직후 외국인 투자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 경제에 따가운 비판을 쏟아냈다.
"기업들은 물론 한국 경제 전체를 믿을 수 없다"는 게 그 요지였다.
시장의 신뢰를 받으려면 무엇보다 기업 스스로 엄격한 '윤리경영'을 실천해야 하는데 한국 기업들은 윤리경영 측면에서 '낙제점 이하'라며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 경제에 윤리경영이 최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주요 대기업은 물론 지역 기업들까지 앞다퉈 '기업윤리강령'을 제정하고, 윤리경영 실천을 천명하는 등 윤리경영이 붐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는 윤리경영을 통해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응, 국내.외 시장으로부터 신뢰를 받아 기업 스스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절박함이 깔려 있다.
▲너도나도 '윤리경영'
우리나라 100대 기업의 60%가 '기업윤리강령'을 제정, 윤리경영을 나름대로 실시하고 있다.
경영 전문지인 '월간 현대경영'에 따르면 100대 기업 중 60%가 윤리강령을 제정했으며 앞으로 이를 실천할 기업이 11%, 올 하반기나 내년 중 이를 제정할 예정인 기업이 9%에 달했다.
100대 기업중 최초로 윤리강령을 제정한 기업은 POSCO로 10년 전인 지난 1993년 윤리강령을 제정했으며, 1994년 LG전자 등 LG그룹 7개사가 기업 윤리강령을 선보였다.
이후 1995년 삼성중공업과 LG니꼬동제련 등 11개사가 윤리강령을 만들었다.
특히 삼성그룹은 삼성전자가 2001년 윤리강령을 제정하는 등 1995~2002년에 걸쳐 계열사별로 윤리강령을 마련해 실천해 오고 있으며, LG그룹은 대부분 계열사가 1994년부터 윤리경영을 실천해오고 있다.
기업경영 우선 가치 부상
이들 기업이 제정한 윤리강령의 주요 내용은 내부 규정준수와 협력업체와의 관계 및 주주.고객.종업업과의 관계에서 지켜야할 윤리 규정 등이며 환경보전 및 사회봉사에 관한 내용도 점차 중시되는 경향이다.
지역 기업들도 윤리경영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호텔 인터불고는 최근 협력업체 대표와 임직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협력업체 윤리강령을 채택하고 실천결의를 다졌다.
호텔 인터불고는 협력업체와의 투명거래를 위한 실천지침을 채택하고 홈페이지에 협력업체 제안란 개설, 윤리강령 실천 고과실시, 윤리강령 실천 우수업체에 마일리지 혜택을 주기로 했다.
화성산업(주) 동아백화점은 지난해 7월 지역 최초로 윤리경영 선포식을 갖고 윤리경영 서약, 비윤리사례 접수창구와 윤리실천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기업윤리를 경영의 우선 가치로 두고 있다.
대구백화점도 지난해 하반기부터 윤리경영을 강조하면서 협력업체와의 신뢰쌓기에 노력하고 있다.
▲윤리경영이 경쟁력
윤리경영을 도입한 기업들을 대상으로 도입 계기를 조사한 결과 '글로벌 스탠더드 부응'이 31.0%로 가장 많았다.
그 다음으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완수'(29.9%), 'CEO(최고경영자) 경영방침'(20.7%), '국내.외 경쟁력 강화'(18.4%) 등의 순이었다.
공정거래 실현 최우선
최근 윤리경영 실천 결의대회를 갖고 윤리헌장 및 행동지침을 제정, 선포한 한화건설 김현중 사장. "윤리 덕목을 직무수행의 기준으로 삼아 투명하고 합리적인 기업풍토를 정착시키는데 전 임직원이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노력하겠습니다". 한화건설은 윤리헌장에서 '고객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최우선 목표로 정하고 법규 준수 및 공정한 경쟁, 공정한 거래, 주주 및 투자자에 대한 의무와 책임 등 사안별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마련했다.
실천조직으로는 사내에 대표이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윤리경영위원회와 윤리사무국을 구성해 윤리지침에 대한 모니터링과 징계, 포상 등을 실시하고 협력업체로부터 불공정 거래에 대한 신고서를 받을 방침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지난 달 말 기업윤리학교를 개설, 주요 기업의 기업윤리 담당 부서장들을 대상으로 윤리경영 우수사례를 교육하고, 윤리경영 이론과 국제적 동향을 알려줬다.
전경련은 "국내에서 기업윤리를 확산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이 윤리경영 실무전문가 양성이라는 판단 아래 기업윤리학교를 기획하게 됐다"고 밝혔다.
중소기업청도 일정 규모 이상의 자금을 지원받는 중소기업에 대해 회계감사보고서 제출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중기청 관계자는 "금융권이 중소기업의 회계부실 및 투명성 부족으로 중소기업에 대한 신용평가와 신용대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이같은 방안을 마련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갈 길이 멀다"
윤리경영이 제대로 실천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심섞인 시각들이 적지 않다.
윤리강령에 적힌 내용들이 기업경영 현장에 아직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것이 경제전문가들의 대체적 의견이다.
그 사례 하나. 외부감사인으로부터 재무제표에 대한 '적정' 의견을 받은 상장.등록법인의 비율이 소폭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02회계연도 감사보고서를 제출한 12월 결산 상장.등록법인 1천326개 가운데 외부감사인으로부터 회계기준에 위반된 사항이 없는 '적정' 의견을 받은 기업은 1천298개로 97.9%였다.
2001회계연도의 경우 '적정' 의견을 받은 상장.등록법인이 98.9%였던 것을 감안하면 기업들의 회계 투명성이 다소 퇴보된 것으로 평가됐다.
특히 분식회계 의심이 있다고 여겨지는 '부적정'과 '의견거절'의 비율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았지만 전년의 0.2%에 비해 3배나 높아졌다.
지배구조 등 과제 산적
불투명한 한국의 기업지배 구조도 윤리경영 토착화를 가로막는 요인. 국내.외 경제전문가들은 한국의 기업지배 구조에 아직 개선돼야 할 점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주요 지적대상은 좋은 지배구조에 대한 보상 불확실, 기관투자가들의 소극적 의사결정 참여, 취약한 지배구조에 대한 제재의 일관성 결여 등. 최도성 서울대 교수는 최근 열린 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 등 주관 '한국 기업 지배구조 개선' 세미나에서 "외환위기 이후 계속된 기업지배구조 개선 노력에도 불구, 최근 SK글로벌사태를 비롯해 현대상선의 대북송금 문제 등 실패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좋은 지배구조를 갖춘 기업에 대한 보상이 미미한 반면 지배구조가 취약해 분식회계 등이 이뤄져도 이에 대한 제재가 너무 약하기 때문에 이같은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리처드 사뮤엘슨 UBS워버그 일본지사 대표도 같은 세미나에서 작년 실시된 한 조사를 인용, '기업이익의 임의적 관리'부문에서 한국이 31개 조사대상 국가 중 오스트리아, 그리스에 이어 세번째로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한국기업의 지배구조 취약성을 꼬집었다.
그는 "한국은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규제 등의 인프라를 만드는 것도 중요 하지만 적용시 제재의 강도 등에서 일관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폴 매튜 '아시안 펀드(아시아 특화 뮤추얼펀드)' 대표 역시 고객들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한국에 투자하지 않는 이유로 '불투명한 기업지배구조와 공시제도'를 꼽는 응답자 수가 '북한문제', '비주류 시장'에 이어 세번째로 많았다고 소개했다.
이대현기자 sk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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