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의 난 진압한 중 학자

입력 2003-05-02 09:39:15

증국번(曾國蕃.1811~1872).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지만 중국 역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조선말 한반도를 좌지우지했던 정치가 이홍장(李鴻章)을 발탁하고 키운 인물이라면 이해하는데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사실 그는 이홍장보다 몇단계 더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는 학자임에도 군대를 이끌고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했고 서구 열강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으로 양무(洋務)운동을 추진, 중국 근대화의 초석을 놓았다.

무엇보다 그는 공리공론에 매달리는 고리타분한 선비가 아니라, 실천하고 행동하는 유학자였다는 점이 현대인들을 매료시키는 이유다.

이 때문에 1920년대 중화민국의 권력을 장악한 장개석은 유교로 무장한 탁월한 전략가로 증국번을 꼽았고, 모택동도 민중혁명을 진압한 증국번의 죄상(?)을 비판하면서도 나라를 구한 합리적 지도자로 큰 존경심을 표했다.

그의 삶은 전형적인 학자로 출발해 합리적인 정치가로 끝을 맺는다.

원래 주자학자로, 문장가로 유명했다.

젊은 시절 그는 "앞으로 천하를 징청(澄淸.안정되고 맑고 깨끗함)하게 만들겠다"는 뜻을 세우고 '나라의 번리(藩籬.울타리)'가 되겠다는 뜻으로 이름을 '국번'으로 바꿨다.

1860년 태평천국군이 진격해오자, 황제로부터 호남을 방위하라는 명령을 받으면서부터 그의 현실참여가 본격화된다.

고향의 호족들을 중심으로 의용군인 상군(湘軍)을 조직하고 양자강에서 수군을 새로 편성, 연전연승했다.

영국과 프랑스군의 원조를 받아들여 남경을 공략해 탈환에 성공,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했다.

그 와중에 황제로 옹립하려는 주변 세력의 움직임도 마다하고 평생을 한결같이 청렴 강직하게 살다 간 전인적 인격체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후 그는 정치의 쇄신, 감세, 농민폭동 진압, 서구열강에 대한 타협정책 등을 펴나가면서 청나라 말기의 일시적인 중흥기(同治中興)에 큰 기여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외국과의 화친을 기반으로 서양의 군사기술을 비롯한 문물을 도입하는 정책을 밀어붙인다.

주변의 엄청난 비난과 반대를 무릅쓴 행동이었다.

뒷날 양무운동의 시작이자 중체서용(中體書用)론의 성과로 나타난다.

학자로서 이념적 명분보다는 현실적 국가 이익을 선택한 그의 행동에서 합리적 리더십을 발견했다고 하면 어떨까.

한때 그는 중국 역사가들에게 수구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연구대상에서 제외된 인물이었다.

한인으로서 한인들의 봉기를 진압하고 청나라에 충성을 다했다는 점에서 만주족의 앞잡이(漢奸)라는 감정섞인 비판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10여년전부터 그의 합리적 경세철학이 서서히 인정받기 시작했고, 중국인의 도덕과 가치관을 행동으로 실현했다는 점이 널리 알려지면서 현대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다.

중국의 정치.사회환경이 바뀌면서 뒤늦게 인정받은 셈이다.

'중체서용의 경세가 증국번'(이끌리오 펴냄. 총 샤오롱 지음, 양억관 옮김)은 딱딱한 전기나 평전이 아니다.

소설의 형식을 빌려 쉽고 가볍게 그의 삶을 조명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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