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노트-참사 겪고도 자세는 그대로

입력 2003-04-29 12:00:32

"사랑하는 가족을 보내는 마지막 날까지도 정말 이럴 겁니까?"

28일 오전 대구 월배차량기지. 지하철참사 사망자 27명의 유해가 인도되던 그 현장은 또한번 행정력 부족을 증명하는 자리였다.

처음으로 많은 유해가 한꺼번에 인도돼서 그런지 관계 기관들은 현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유해 인도 차례를 몰라 운구 자동차들은 뒤엉켰다.

한 노부부의 유해는 같이 참변을 당하고도 영 동떨어지게 각각 인도돼 유가족들이 분노했다.

자신들이 준비해 온 수의와 관을 사용하겠다는 유가족을 설득하느라 유해 인도가 지연되기도 했다.

당초 가족당 5명씩 입관을 참관토록 했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입관실은 혼잡하기 그지 없었다.

오전 11시쯤엔 결국 김모(여)씨의 절규가 입관실 담 밖을 넘는 일까지 벌어졌다.

수의로 감싼 남편(56)의 유해가 관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항의하다 기절하기에 이르렀던 것. 유해가 팔을 벌린 상태여서 일반적인 모양의 관에는 들어가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보다 큰 관이 도착하기까지 1시간30분 동안 전체 유해 인도가 중단됐다.

그때문에 다른 유가족들이 발을 동동 굴렸다.

문제가 거기서 그친 것도 아니었다.

김씨가 실신하자 유가족들이 "의사! 의사!"라고 외쳤지만 의료진은 현장에 없었다.

김씨는 결국 병원으로 실려가야 했고, 현장 응급실은 오후가 돼서야 설치됐다.

응급의료팀 파견은 이번 참사 유해 인도 초기부터 요구됐지만 대구시의 불감증은 이날까지도 이어졌던 것이다.

일이 잇따라 복잡해지자 대구시 공무원들은 몸 사리기에 바빴다.

유가족들이 거치게 항의하는데도 나서서 수습하려는 이는 없었다.

어떤 사람은 "당번제로 파견돼 오느라 상황을 제대로 파악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대참사를 겪고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그때 그 수준에 머물고 있음이 확실해 보였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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