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권에 비친 한국상 9세기 문헌 이미 나타나

입력 2003-04-26 11:31:24

'산이 많고 금이 풍부하고 그곳에 정착한 이슬람 교도들은 영원히 떠나려 하지 않는 나라가 중국의 맨 끝에 있는 신라국이다'.

이라크 전쟁으로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렸던 회교 땅 중동. 오일쇼크와 중동건설 붐의 신화, 걸프전쟁, 세계 3대문명 발생지의 하나인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으로 알려진 지역.

이같은 중동사회에게 우리 한국은 언제부터 어떤 나라로 알려졌을까.

서구의 문헌 가운데 한국이 처음 소개된 것은 마르코 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는 달리 중동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이보다 450년이나 앞선 9세기 중엽에 나온 문헌중에 한국에 대한 내용들이 소개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한국 외국어대를 정년퇴직한 경북 경산의 아시아대학교 김정위(66.이란어과) 총장의 논문 '중세 중동문헌에 비친 한국상'에 따르면 9~14세기까지 중동학자.상인 등 17명의 문헌에 한국을 소개한 것으로 조사됐다.

먼저 페르시아인인 이븐 후르다드비는 846년과 885년에 펴낸 책 '제 도로와 제 왕국안내서'에서 2건의 한국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산이 많은 나라가 있다.

그나라는 영주국들로 갈라져 있다.

그 곳에는 금이 풍부하다.

이슬람 교도들이 이 나라에 상륙하면 그 곳의 아름다움에 끌려서 영구히 정착하고 떠나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나라(신라)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라고 신라를 처음 언급하고 이슬람 교도들의 왕래를 기록했다.

이런 기록은 한국사료 가운데 고려사가 처음으로 중동을 나타내는 대식국(大食國)에 대한 기록(고려 현종때인 1024년)보다 200년 가까이 앞선다.

고려사에는 1024년 즉 고려 현종조 15년9월에 열라자 등 100명과 이듬해 9월 하선라자 등 100명, 1040년에 객상 보나합 등이 고려에 와서 봉물을 바쳤다고 남기고 있다.

또 851년에 출간됐으나 931년에 알려진 무역상 술라이만의 풍물기 '중국과 인도에의 안내서'에는 "(중국의) 해안에 신라라는 섬들이 있다.

그 곳의 주민들은 피부가 희다.

그들은 중국 황제에게 선물을 보내고 흰매를 가지고 있다"라며 신라를 섬으로 본 것이 특이했다.

903년에 사전류의 저서인 '값진 귀중품 목록'을 남긴 이븐 루스타도 '신라에는 금이 풍부하고 그 곳에 도착한 무슬림들은 정착해서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라 했다.

966년 무타하르 이븐 타히르 알 막디시가 집필한 '창세와 역사본'에는 '중국의 동쪽 나라 주민들은 가옥을 비단과 금실로 수 놓은 천으로 단장하며 식사 때에는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고 제 도로와 제 왕국 안내서에 적혀 있다'고 소개했다.

심지어 1154년에 선보인 알 이드리시의 지리서는 '먼 나라를 종횡할 꿈을 가진 자들의 산보'에서 '서로 밀접한 여러 섬으로 이뤄진 신라에는 금이 너무 흔해서 심지어 그곳에는 풍족하고 좋은 것이 많아서 주민들은 개의 쇠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그들은 스스로 옷을 짜서 내다 판다'로 묘사했다.

아제르바이잔 출생의 자카리야 카즈위니는 천지학에 관한 두권의 저서 '창조의 경이와 존재의 희귀성''제국의 남긴 자취'에서 '수많은 섬으로 구성된 신라는 매우 유쾌한 나라이다.

공기가 순수하고 물이 맑고 토질이 비옥해서 병을 볼 수 없는 곳이다.

주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다.

또 가장 건강하다.

집에 물을 뿌리면 호박의 향기가 난다고 말한다.

전염병과 다른 병들도 그곳에는 드물고 파리와 날짐승들도 거의 없다.

다른 섬의 환자가 신라에 오면 완치된다고 한다'고 했다.

이들 문헌들을 조사했던 김 총장은 "우리 사료와 중동문헌은 중동인들이 한반도를 방문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면서도 "갈수록 중동인들의 신라에 대한 구체화현상은 지식의 심화보다 상상력의 발전"이라 분석했다.

김 총장은 또 중동인들이 신라를 이상향으로 본 것은 신라에 금이 많이 난다고 믿었기 때무인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정인열기자 oxe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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