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김천 직지사에 간 적이 있다.
절집이란 갈 때마다 공양미처럼 들고 간 무거운 마음을 스스럼없이 받아 준다.
절 마당을 돌아나가는 샘물에 손을 씻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이리저리 주변의 나무들을 돌아보던 중, 아주 오래된 등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마치 그 등나무는 온몸으로 기어가는 고행승처럼 깡마르게 비틀려 있었다.
나무의 몸 마디마디 관절이 닳아서 숭숭 구멍이 뚫린 채 부스럼 투성이였다.
마치 하늘로 오르기 위해 허물을 벗는 영험스런 뱀 같이 비스듬히 허공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늙을수록 정신만은 꼬장꼬장 살아남아 곧 새순이 돋아나올 것 같았다.
볕 좋은 오후의 햇살이 거욱거욱 나무의 등을 타고 올라 나른하게 굽은 허리를 펴면, 등나무도 잠시 쉬고 싶은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골똘한 생각에 젖는다.
나는 등나무 곁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어쩌면 저 등나무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땅바닥을 배밀이로 기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가는 길이 힘들어 제 안으로 함몰해 버리고 싶은 적도 많았을 것이다.
이만큼 왔다 싶어 뒤를 돌아보면 언제나 제 자리 걸음이다.
내가 가야할 길은 늘 나보다 앞서 달아나고 있었다.
나도 저 나무처럼 기어서 한 세월을 건너 갈 수 있을지 내심 다짐 해본다.
그 등나무를 보고 온 뒤 몇 번의 봄비가 내렸다.
비소리가 들리는 밤이면 그 등나무 생각이 난다.
아마 수행자 같은 그 나무도 밤잠을 뒤척일 것만 같다.
그래서 이 봄비 끝에 보랏빛 등꽃이 필 것만 같다.
낮은 곳을 밝히는 백열등처럼, 아래로 아래로 등을 켜고 제 안을 비추어 보는 보랏빛 꽃타래. 그 꽃등 아래 벤치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두커니 앉아 깊은 밤을 지새울지. 이 밤 나는 빗줄기를 타고 등나무 속으로, 시 속으로 침잠해 간다.
꽃보다 계절이 빠른 탓일까. 어느새 지상의 나무들은 온통 하늘로 연둣빛 이파리를 피워 올리고 있다.
내 시는 꽃피는 시간보다 지는 때가 더디길 바라본다.
시인 이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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