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기업인들이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북핵문제, SK글로벌 분식회계, 이라크 전쟁 등으로 국내외 소비가 위축되면서 재고 물량이 폭증하고 있는 가운데 어음부도율이 치솟아 대금 회수 지연 사태가 봇물을 이루는 반면 은행들의 여신 심사 강화로 대출은 더욱 어려워져 기업의 숨줄인 자금 회전이 꽉 막히고 있다.
이같은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부도기업이 속출하고 있고, 섬유업체가 주종을 이뤘던 지난해와 달리 기계, 금속, 건설업 등 전 업종을 가리지 않고 있다.
지역 기업인들은 '이제 더 이상 회사를 꾸려갈 수 없다'며 절망과 분노의 한숨을 토하고 있다.
◇쌓이는 재고
14일 오전 11시 성서공단 2차단지내 성아섬유.
종업원수 43명에 제직기 54대, 연사기 20대를 갖춘 1천여평 규모의 공장은 거대한 재고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류홍훈 성아섬유 사장은 세계 경기 위축으로 올해 초부터 쌓이기 시작한 재고 물량은 미-이라크 전쟁이 터지면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났다고 했다.
100만 야드 규모의 공장 창고가 턱없이 모자라 내부 각 통로는 물론 공장 앞마당에도 300만야드 규모의 원단을 쌓아두고 있다는 것. 매월 2~3억원 규모의 폴리에스테르 원단을 생산했던 이 회사는 주문량 급감으로 3개월 연속 월 매출액이 70%이상 줄었다.
류 사장은 "은행에서 차입한 돈이 무역금융 6억원, 일반금융 3억원으로 10년전 섬유업에 뛰어든 이후 가장 많은 돈을 빌렸다"며 "당장이라도 회사를 정리하고 싶지만 할줄 아는 것이 섬유장사뿐"이라고 말했다.
같은날 대구 서대구공단 베틀1길 ㅁ수출포장. 이 회사 박모(45) 사장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400여평의 공장엔 100만야드에 이르는 포장지만 수북이 쌓여 있었고 컨베이어, 밴딩기, 지게차 등 공장 내 모든 기계는 작동을 멈추고 있었다.
3년전 1억 7천만원을 투자해 회사를 설립한 박 사장은 현재 5천만원이나 되는 금융빚을 떠 안고 있다.
지난해까진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았지만 올해부터 미-이라크 전쟁으로 중동 수출길이 완전히 막히면서 매달 3천만원에 이르던 매출액이 600만원 수준으로 뚝 떨어졌고 3월 이후 생산액은 아예 전무한 실정이다.
8명에 이르던 직원을 4명으로 줄였지만 집세 660만원, 인건비 400여만원 등을 빼고 나면 매월 700~800만원에 이르는 적자만 쌓이고 있다.
박 사장은 "이달 안으로 공장을 정리할 생각"이라며 "그러나 마흔 중반의 나이에 어떻게 새 직장을 구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허탈해 했다.
◇자금회전이 안된다
지난 11일 서대구공단에서 만난 흥일섬유 박현수 사장은 거래업체 중 하나가 부도를 내 회사 전체가 비상에 걸렸다고 했다.
지난달에도 일을 맡긴 업체가 1천만원짜리 어음을 부도내 자금 회전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박 사장은 최근 어음 부도율이 치솟아 선의의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경기 침체로 상도덕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의도적으로 어음부도를 내는 기업인들이 상당수 생겨나고 있다는 것. 닥치는 대로 어음을 끊어 원자재를 공급받고 거의 덤핑가격 수준의 제품을 시중에 유통시켜 뒷돈을 챙긴 뒤 바로 잠적해 버리는 사업주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상황이 계속될 경우 자신도 같은 방법으로 부도를 낼 수밖에 없다"며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자책했다.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에 따르면 지난달 지역 어음부도율(전자결제액 제외시)은 0.55%로 2001년 7월 0.62% 이후 가장 높게 나타났고 2월 어음부도율 0.49%에 비해서도 0.06%포인트 상승했다.
어음부도로 인한 대금 회수 지연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있다.
강인성 진양 엔터프라이즈 사장은 "수년간 거래를 터왔던 업체라 믿고 일을 맡았지만 최근 세계 경기 위축에 따라 미국, 브라질 등 3개 해외 거래 업체가 동시 부도를 내 40만달러의 피해를 입었다"고 말했다.
강 사장은 은행에선 갈수록 줄어드는 1년 매출액을 기준으로 신용대출을 해 준다며 자금 회전이 가장 큰 걱정이라고 했다.
종업원 25명에 40대 규모의 연사기를 갖추고 임제직을 하는 동신섬유 장성학 사장도 사정은 마찬가지. 올해 초부터 주문이 끊겨 하루종일 거래처를 돌아다니며 영업사원 노릇을 하고 있는 실정으로 매달 1천300만원에 이르는 전기세가 한달 매출의 절반까지 육박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돈 만들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것.
장 사장은 "예전엔 담보물의 70~80%수준까지 대출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50%도 빌리기 힘들다"며 "돈 걱정에 스트레스가 자꾸 쌓여 속병까지 생겼다"고 했다.
공장 전문 부동산 관계자도 "공장 매매시 은행 대출 한도가 공장 가격의 80~90%에서 지금은 70~80%대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부도업체 속출
금융결제원에 따르면 16일 현재 부도 등으로 인한 대구 지역 당좌거래정지 업체수는 57개로 지난해 같은기간 44개업체에 비해 13개 늘어났다.
건실한 중소기업이 밀집해 있는 대구시 성서공단 경우 이달 현재 공단내 부도 기업은 모두 9개 업체로 지난해 4개 업체를 벌써 배이상 넘어섰다.
부도업체는 섬유 3개, 기계·금속 6개 업체로 비교적 경기가 괜찮은 자동차부품업체 2곳이 포함돼 지역 제조업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이 회사들은 종업원 40~50명 규모에 월 매출액이 3억~4억에 이르는 중견업체들이다.
자동차부품회사를 경영하는 정규일 캠코 회장은 "자동차부품업계의 물동량이 늘어나고 있지만 대기업의 원가 절감 요구가 도를 넘어 갈수록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다"며 "자금압박을 받는 자동차부품업체들이 많지만 은행 대출이 쉽지 않아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직원 2~3명의 섬유 무역회사 10여개가 몰려 있는 서대구 공단 모 건물에서도 최근 한달새 절반 이상이 휴·폐업을 했다.
이 건물 그린TEX 류문영 사장은 올해 주문량이 아직까지 단 한건도 없는 상황이라며 30만원의 임대료와 전화요금까지 두달치 밀렸다고 하소연했다.
류 사장은 "최근 경리·관리를 맡고 있던 2명의 직원들을 내보내고 혼자서 회사를 꾸려가고 있다"며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차라리 막노동을 하는게 속 편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부도업체가 봇물을 이루면서 성서공단, 서대구공단, 3공단 등 지역 공장 밀집 지역엔 공장매각, 급매, 긴급처분 등의 대형 플래카드와 전단지가 전봇대와 공장 담벼락에 빼곡히 들어찼다.
공장부지와 설비를 담보로 은행돈을 빌려쓰다 부도 등으로 인해 법원경매에 넘기는 사례도 속출해 이달들어 대구지법 경매계에 나와 낙찰됐거나 경매에 부쳐질 공장도 무려 46건으로 지난해 6~12월(월평균 10여건)과 지난달(30여건)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공장 전문 부동산에 따르면 올해초부터 공장을 팔려는 사람은 줄을 잇는 반면 사려는 사람은 없어 공장 매매가 완전 중단된 상태다.
국내외 경기가 갈수록 악화, 공장 매수를 꺼리는데다 값이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는 매수인이 많아 공장 매매가 좀체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
대농부동산 김태연 소장은 "올해 매도 건수는 20건에 이르고 있지만 매수 건수는 겨우 2건에 불과한 데다 300평 이상 대형 공장은 아예 사려는 사람이 없다"며 "이라크전 발발 이후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준기자 all4you@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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