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옥입니다-그 소리

입력 2003-04-15 09:13:19

수필가 피천득 선생은 '신춘(新春)'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문득 들리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미안합니다'하는 신선한 웃음소리는 나에게 갑자기 봄을 느끼게 하였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기억의 통로는 사람마다 제각각인 모양이다.

초등학교시절의 여선생님 얼굴은 까맣게 잊었지만 어느 날 어깨 위에 와닿았던 부드러운 손길의 촉감만은 또렷이 기억하나하면, 어떤 이는 소식없는 옛친구나 세상떠난 지인들을 그 사람의 옷색깔, 독특한 말투나 웃음소리, 스쳐지나갈 때의 체취 등으로 기억하기도 한다.

피 선생에겐 이름모를 한 여성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봄의 이미지로 각인됐던가 보다.

지하철 참사 이후 한동안 차량통행이 금지돼 도심의 무인도같았던 대구 중앙로가 재개통되면서부터 활기를 되찾고 있다.

하루종일 차소리가 붕붕거리고 행인들의 얼굴엔 웃음이 번지고 있다.

거리는 여전히 무질서하고 차량정체도 심각하지만 사람사는 동네 같아서 그저 반갑다.

온갖 일상의 소리들 중엔 어느 순간부터 절절한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많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한 중년 남자는 새벽녘 부엌에서 들려오던 아내의 도마질 소리가 너무도 그립다고 했다.

비단 아내 뿐일까. 잠결에 들려오던 우리 어머니들의 소리-밥짓느라 동동거리며 오가는 발걸음 소리, 음식끓는 소리,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대청마루에서 들려오던 다듬이질 소리-는 하나같이 그리운 삶의 풍경화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꽃 피는 사월에 잃었던 한 아버지는 "꽃방석을 깔아준다해도 나는 봄이 싫다…"고 애잔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그에겐 세상의 그 어떤 것 보다 "다녀왔습니다!"하는 딸의 발랄한 목소리를 다시 듣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일지 모른다.

미운 정 고운 정 이라는 말처럼 때로는 지겹고 성가시던 소리들조차도 그리움으로 남는다.

아내의 바가지긁는 소리, 남편의 귀찮게 잔심부름 시키던 소리, 심지어 가래뱉는 소리까지도….스위스나 뉴질랜드, 북구라파 등에 처음 간 사람들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에 악! 소리를 낼만큼 감탄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너무 조용해서 무료해진다고 한다.

"심심한 천국(선진 외국)보단 재미있는 지옥(한국)이 낫다"는 우스개도 그래서 나온 모양이다.

다시 시끌벅적해진 중앙로를 걷자니 문득 이런 카피가 떠오른다.

'그래, 바로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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