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뫼비우스의 띠

입력 2003-04-14 09:38:17

우리가 자주 접하는 종이에는 앞 뒤 양면이 있고 보는 위치에 따라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있다.

이런 종이를 길쭉한 사각형으로 오려 양끝을 맞붙이면 역시 안과 밖 양면이 있게 된다.

그런데 직사각형의 종이를 한 번 꼬아서 양끝을 마주 붙이면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이른바 수학에서 말하는 뫼비우스의 띠가 만들어지게 된다.

직사각형의 안이라 생각되는 부분이 한 번의 꼬임으로 바깥부분이 되는 역전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작든 크든 변하게 되어 있고 거기에 비례하여 시련이나 고통을 수반한다.

예컨대 혁명이나 쿠데타 같은 경우가 크고 갑작스런 변화라 할 수 있겠고 무슨 세계관이나 사상의 경우는 너무 심대해서 잘 감지되지도 않게 변화한다.

인간사에서 흔히 음지가 양지로 되고 양지가 음지로 되는 일도 그냥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럴 경우 크게 바뀌려면 큰 시련이, 작게 바뀌려면 작은 시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번 이라크 전쟁도 이라크내의 국면을 전환시키기 위해 일어나는 고통이고 시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뫼비우스의 띠에서처럼 세상사에 꼬임이 일어나 앞이 뒤가 되고 뒤가 앞이 되면서 결국 하나의 곡면을 제대로 형성할 수 있을지 아니면 장시간 갈등만 계속 일으킬지 모른다는 것이다.

세상이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고 본다면 끝에 가서는 모든 것이 한데로 어우러지거나 통합되겠지만 거기에 소요되는 시간과 희생이 어느 정도인가가 중요하다.

이 번에 전교조 교사들과 교장 선생님 사이의 문제는 단절과 대립의 이미지가 너무 크다.

한 교장선생님이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대립의 윤리적인 측면까지 드러냈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화해나 문제의 해결로 가는 느낌이 아니다.

지금 양편은 사건의 본질과 현상, 이상과 사실 등 각기 다른 각도에서 또 거기에다 그 동안의 반목과 질시 그리고 응어리들까지 함께 쏟아내고 있는 형국이다.

모두가 양분되어 사태를 비극적인 절망으로 치닫게 해서는 안되며, 만신창이가 되어 화해하고 함께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이다.

유리한 고지만 점하려 하기보다 뫼비우스의 띠에서처럼 안팎에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는 현명함이 아이들 교육에도 좋을 듯 싶다.

대구산업정보대학 입학관리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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