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개비-2003년4월은 잔인한 달

입력 2003-04-03 10:27:49

4월이다.

TS엘리어트는 시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추억과 욕망을 뒤섞어/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워 놓는다/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고 묘사했다.

생명을 피어내지 못하는 4월은 '잔인한 달'인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왔다.

수양버들은 사람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는듯 서둘러 봄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새 봄이 왔음을 느낄 여유마저 허락지 않는 요즘이다.

지난 2월18일 대구에서는 기억조차 하기 싫은 비극이 발생했다.

역시 '인재(人災)'였다.

대형 참사의 그림자인양 따라다니는 '인재'라는 말을 계속 들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은 아니리라. 그러나 무엇에 홀린 듯 수습과정도 엉망이었다.

대구시와 경찰, 검찰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공권력은 무장해제됐다.

참사를 취재하면서 '과연 대구가 이번 사고를 계기로 안전한 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라는 원초적 질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취재중 만난 전문가는 "범죄는 모방된다"고 경고했다.

대구지하철 참사와 같은 대형 참사가 주는 극단적인 사회적 충격파는 '잠재적 방화범'들의 뇌리에 깊이 잠복해 있다가 어느 순간 악마와 같은 광기를 드러낸다고 했다.

버스, 기차, 비행기, 대형 쇼핑몰, 복합상영관, 고층빌딩…. 화마가 발생하면 대형 참사가 날 수 있는 곳은 주변에 널려 있다.

얼마전 천안에서는 단 15분간의 합숙소 화재로 8명의 어린 목숨을 앗아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는 어찌보면 현대 도시인이 안고 살아야 할 리스크 중 하나다.

모든 시설물을 불연재로 만들지 않는 이상 화재가 나면 어느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

한 전문가는 "사고를 예방하겠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사고가 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방재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이번 참사 이후 쏟아지는 각종 안전대책들은 하드웨어(시설)에 치중되고 있을 뿐 소프트웨어적인 것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이번 참사에서도 기관사와 사령실 직원들이 지하철 화재에 대비한 소방메뉴얼만 제대로 숙지했더라면 인명 피해를 10명 이내로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삼풍백화점 참사 이후 서울시는 수백억원을 들여 통합방재시스템을 구축했다.

통합방재시스템 개념이 없는 대구에서 이번 참사 때 시와 소방서, 경찰은 완전히 따로 움직였고 허둥댔다.

그래서 인명피해가 더 컸다.

대구시도 각 방재 주체들이 재난에 일사불란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통합방재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안전'은 이제 대구시가 지향해야 할 최고의 '아젠다'가 됐다.

길 뚫고 다리 개설하는 것보다 시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무슨 무슨 이름의 거창한 '프로젝트' 조차도 시민 안전보다 우선할 수 없을 것이다.

김해용 kimhy@imaeil.com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