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데스크-처변불경 장경자강

입력 2003-03-28 12:02:55

전쟁은 인류를 괴롭히는 최대의 재앙이다.

막을 수만 있다면 무조건 막아야 한다.

그러나 국가와 국가의 이익이 극명하게 충돌하는 국제관계에서 외교 교섭을 통해 서로 '윈-윈'하는 접점을 찾지 못한다면 약육강식의 '제로-섬'이 지배하는 전쟁으로 치닫기 쉽다.

기원전 1500년부터 서기 1860년까지 영구적인 평화의 보장을 전제로 하는 평화조약이 약 8천건이나 체결됐지만 그 효력이 지속되기는 평균 2년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인류의 역사는 불행하게도 전쟁의 역사다.

자국 이익 중심의 국제 관계

전쟁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가장 야만적인 마지막 수단이지만 그래도 전쟁에 나서는 국가들은 저마다 명분을 내건다.

이라크전쟁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이라크 모두 나름대로의 명분을 내세우며 국제사회의 지지를 호소하고 또 전쟁을 지켜보는 나라들도 '명분이 있다' '없다'를 따지며 편이 갈린다.

그러나 명분은 겉치레일 뿐이다.

각국 정부는 저마다 냉엄하게 움직이는 국제질서의 틀 속에서 철저히 '자국 이익' 중심으로 전쟁 개시 여부를 결정하고 지지하는 나라를 선택한다.

이라크 전쟁과 관련된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5대 강국의 입장의 차이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라크의 석유매장량은 1천125억배럴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

석유산업을 국유화한 후세인을 권좌에서 밀어내면 미국과 영국은 중동산 원유를 안정적인 가격으로 공급받고 이라크의 원유개발에도 참여하는 전리품을 거둘 수 있다.

반면 러시아, 프랑스, 중국은 현재 갖고 있는 이라크의 원유개발권이 무효화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지난 2002년 이후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등장한 러시아는 유가하락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도 감수해야 될 입장이다.

결국 이라크를 둘러싼 5대 강국의 편가름은 명분이 아닌 실리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이라크전쟁에 따른 논란과 편가름은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로 뜨겁다.

이라크전쟁의 명분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는 우리 군의 파병을 찬성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별다른 이견이 없다.

현재 이 시점에서 우리가 '명분'을 따를 것인지, '실리'를 따를 것인지 하는 선택의 차이일 뿐이다.

명분과 실리가 항상 같은 선상에 위치하면 얼마나 좋겠나마는 그렇지 못한 것이 세상 이치다.

실리 때문에 명분을 헌신짝 버리듯 하는 것도 문제지만 명분에 얽매여 실리를 게을리하는 것도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지금의 미국이 과연 우리가 무시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나라인가.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만 있다면 명분을 스스럼없이 선택해도 좋다.

명분을 따른다 하더라도 미국을 무시하는데 따를 반대급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러나 좋든 싫든 현재의 미국은 엄연히 국제 질서의 중심축이다.

게다가 지금의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결코 소원하게 만들 수 없는 형편이다.

북핵문제를 우리의 희망대로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긴밀한 협조관계가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사실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결정은 노무현정권의 코드와는 맞지 않고 정치적 부담도 크다.

그런데도 정부가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지지의사를 밝히고, 파병을 결정한 것은 결국 현 시점의 한국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익이 파병의 최우선 전제

차제에 이라크 파병결정에서 보여준 노 대통령의 실리 추구가 앞으로의 정책 결정에서도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월드컵 4강이 됐다고 해서 세계 4강이 된 것은 아니다.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좋지만 좌고우면없이 목소리를 마음껏 내도 탈이 없을 정도로 우리가 세계 열강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음은 엄연히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게다가 작금의 상황 역시 실리 대신에 명분을 앞세워도 무방할 정도로 한가로운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역사는 명분과 실리의 갈림길에서 현실 여건을 외면하고 무작정 명분만 쫓다가 큰 화를 입은 일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통령의 의사결정은 민족 전체의 안위 및 번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많다.

'처변불경 장경자강(處變不驚 壯敬自强)'이라고 했다.

처해있는 상황이 변하여도 동요함이 없이 스스로를 자중하면서 힘을 길러 미래를 맞이해야 한다는 뜻이다.

노 대통령의 의사결정이 우리가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처변불경 장경자강'의 자세를 계속 견지하기를 다시 한번 기대한다.

허용섭(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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