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심리공황 털고 다시 일어서자

입력 2003-03-24 12:42:52

대구의 봄은 너무 짧다.

그래서 더 귀하다.

하지만 올해는 그 향취에 젖기에 지하철 참사의 상처가 너무 크다.

대구 사람들은 지금 앓고 있다.

250만 대구 사람들이 이처럼 집단적인 상실감·무력감·좌절감에 시달린 적이 있었던가? 누구는 집단적 심리공황 상태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대구를 안전하고 살맛 나는 도시로 만드는 일은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다.

그 많은 희생을 헛되게 할 수는 없다.

목민관(牧民官)의 전형으로까지 지칭되는 이상희(72) 전 대구시장을 지난 21일 대구에서 만났다.

대구시장(1982~85) 경북지사(1985~87) 내무부장관(87) 건설부장관(90) 등을 지낸 그는 현재 대구대 재단인 영광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참사 소식에 많이 놀라셨지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대구시 행정을 맡은 적 있는 사람으로서 너무 어이 없어 말문이 막혔습니다.

통탄한 마음에 책상을 쳤습니다.

서울서 주로 살지만 일주일에 한번쯤은 대구에 옵니다.

참사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분향소와 부상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았습니다.

여기 와서는 지자체장들과도 자주 만납니다.

조해녕 시장한테는 "정신 차리고 힘내라, 잘 수습해 대구 발전의 전기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수 백년설 추모사업 추진위원장도 맡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관련 가요제가 5월15일 성주에서 열릴 예정이어서 바쁩니다.

-현직에 계실 때 큰 참사를 겪으신 적 있습니까.

▲대구시장으로 있을 때 금호호텔 화재와 '초원의 집' 화재 참사가 발생했었습니다.

그 때 얻은 교훈이 지하공간 재해에는 특별한 예방책과 대응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건 이후 지하공간에 대해 엄격한 화재 대책 기준을 적용했습니다.

다중이 출입하는 지하시설은 가급적 허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부득이 허가할 때는 사람들이 탈출하기 용이한 출입문을 반드시 두 개 두도록 했고 그 문은 쉽게 발견되고 간단히 열 수 있도록 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불만과 항의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같은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절대 허가내 주지 않았습니다.

-이번 사건에서는 뭣을 짚어야 하겠습니까.

▲현장의 문제는 이미 많이 분석됐습니다.

나는 그 바탕에 있는, 우리 사회에 만연된 도덕 불감증을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사회 연대의식이 너무 부족합니다.

사회 구성원은 전체가 함께 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혼자만 잘 살고 혼자만 안전하면 된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도 안타까우니 온갖 생각이 다 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참사의 공범이며 공동책임자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안타까운 부분들도 많으시지요.

▲공직은 시민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자리입니다.

이번에 사건이 커진 것에는 공직자들의 잘못이 한몫 했습니다.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하면 승객은 우왕좌왕하기 마련입니다.

그럴수록 선장과 승무원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선장은 다른 사람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배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은 역사에 길이 남았습니다.

기관사는 배의 선장격입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정신 차리기 쉽잖았겠지만 자신의 판단 하나에 생사가 갈릴 승객들의 안전부터 챙겼어야 했습니다.

큰 재난이 발생한 뒤에는 관련 공무원은 종합적이고도 심도있는 예측과 판단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번처럼 지하에서 대형 화재가 났을 경우에는 현장이 엄청나게 가열돼 완전히 탔을 것임을 최우선으로 예측할 수 있었어야 했습니다.

희생자의 유해가 재가 됐을 가능성을 먼저 생각했어야 하지만 함부로 손 대지 말라고 조언해 준 사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민심의 흐름은 제대로 길을 잡는 것 같습니까.

▲언론들이 실상을 대체로 잘 보도했다고 생각합니다.

피해자 가족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줬으며 문제점도 많이 제기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제안도 많이 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잖습니다.

일본 언론 보도는 대참사가 났을 경우 참혹한 장면이나 자극적인 것을 피합니다.

고베 지진이 났을 때도 참상은 별로 보도를 안했지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참혹한 내용을 많이 보도하면 시민들이 희망을 잃고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물론 원인과 잘못을 따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만, 문제를 풀어 나가는 것도 못잖게 중요합니다.

감자가 많이 달리게 하려면 흙을 파헤치기 보다는 뿌리에 북을 돋워야 합니다.

엉켜 있는 실타래도 마구잡이로 잡아 당기면 더욱 꼬일 뿐입니다.

언론은 실타래를 하나 하나 풀어나가듯 사태에 대처해야 합니다.

-대구지하철 건설과 운영을 중앙정부가 맡아야 한다는 지적도 많습니다만.

▲대구에 지하철은 필요 없고 건설이 정치적으로 추진됐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그렇잖다고 봅니다.

대구에는 지하철이 있어야 합니다.

도로 교통 혼잡으로 인한 시민들의 경제적·시간적 손실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국의 지하철을 중앙정부가 맡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생각이 다릅니다.

그렇게 하면 경비를 줄이고 인사 관리도 통일성 있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역별 교통 정책과 도시계획에 맞게 지하철을 건설·운영하려면 각 도시가 이를 맡는 게 좋습니다.

지하철을 중앙정부가 맡는 것은 지방분권화와도 배치됩니다.

부산 지하철은 국가가 운영하고 있지만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문제는 지자체가 재정을 감당할 수 없다는 점 아닙니까. 그것은 국가의 재정 지원을 통해 해결하면 됩니다.

지자체가 건설·운영을 맡되 부족한 재정을 국비로 보전해야 합니다.

-대구시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고 시정 공백 상황도 심각합니다.

▲소가 범을 만나 싸울 때 주인이 도망가거나 옆에서 잘못한다고 비난해 기를 죽이면 소는 결코 범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주인이 옆에 남아 "우리 소 잘한다, 힘내라"고 응원해 줘야 소는 범을 이깁니다.

주인은 시민들이고, 소는 이 사회를 이끄는 공무원들입니다.

공무원에 대한 실망과 분노도 크겠지만 그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일반 시민은 물론 유가족까지 분위기를 조성해 줘야 합니다.

그것을 못하면 소도 죽고 주인도 죽습니다.

소와 주인이 다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대구시가 하루빨리 정신을 차려 사회가 제대로 굴러 갈 수 있게 일하도록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가 결함을 채워줘야 합니다.

서로 부정하면 공멸합니다.

그 매듭은 시민들만이 풀 수 있습니다.

대구시는 무엇보다 희생자들에 대한 최대한의 보상과 위로 등 해 줄 수 있는 모든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게 하려고 나서야 합니다.

-피해자 가족들이 많이 고통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유가족들의 손을 잡고 같이 통곡하고 싶습니다.

어떤 위로의 말이나 어떤 보상으로인들 그 분함이 없어지겠습니까. 또 지금 마음 아프지 않은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쨌든 이 아픔은 빨리 치유돼야 합니다.

남은 사람은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유족들이 중심이 돼 각오를 다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시민들에게 남겨진 빚은 무엇이겠습니까.

▲대구에 산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낄만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대구시민이라는 사실 자체에 서글픔을 더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3대 도시로서의 위상도 지키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 참사는 '울고 싶은 사람에게 뺨 때리는' 격이 됐습니다.

그러나 대구는 과거에도 위대했고 앞으로도 위대할 것입니다.

대구는 역사적으로도 이 나라를 주도적으로 이끈 고장입니다.

지역 이기주의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대구 시민으로서의 전통적인 긍지를 잊지 말고 살려 나가도록 합시다.

침 한번 삼키고 머리 한번 쓰다듬고 정신 차려서 대구의 영광을 우리 손으로 되살립시다.

김해용기자 kimh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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