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公害'

입력 2003-03-19 12:2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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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이상주 교육부총리가 장관 취임 직후 한 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교사들이 "제발 잡무 좀 줄여달라"고 합창(?)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수십년 묵은 숙제 내가 꼭 해결하마"하고 약속했는데, 그 또한 정권이 바뀌는 통에 시작도 못해보고 부도를 냈다.

신임 윤덕홍 교육부총리도 괜히 5.5.3제(制)니 수능개편이니 생각없이 말을 뱉아 욕보지 말고 교사잡무 하나만 확실하게 해결하면 청사(靑史)에 빛나지 않을까 싶다.

▲선생님들의 잡무, '씰데없는' 보고서 만들기가 교육계의 수십년 불치병이 되어온 데에는 여건개선이 따르지 않는 교육후진국의 탓도 있지만 학교를 '행정의 하부기관'쯤으로 여기고 걸핏하면 '시켜먹는' 아주 나쁜 버릇때문이기도 하다.

교육청부터 그런 시각이니 타기관, 남의 식구야 나무래서 뭣하랴. 몇년전 교총에서 설문조사를 해봤더니 교사의 절반이 잡무때문에 월2회이상 자습을 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이 잡무의 절반이 바로 불필요한 공문서처리 였다.

이게 조금이라도 개선됐다면 오늘, 선생님들이 '합창'을 할리가 없을 터이다.

▲"보고서 좀 줄여주세요"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현행 청와대 보고체계를 개선해달라고 했다.

공문서 좀 줄여주세요, 잡무 좀 없애주세요 하는 선생님들의 호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전임 김대중 대통령의 일화 하나. DJ는 집무실에 쌓이는 보고서 자료를 흔히 관저로 들고가 다읽고는 깨알같이 메모를 달아 내려보냈다고 한다.

그만큼 자상했지만, 피곤했다.

반면에 노 대통령은 서류에 눌려 살지는 않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전통(全統)부터 DJ까지의 국무회의는 장관들이 쥐죽은 듯 앉아 소위 어음(御音)을 받아적는 식이었다.

장관들은 보고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도 보고서를 만들었다.

보고하고 OK사인을 받아야 업무추진력이 생긴다는 의존적 생각, 더 나쁘게는 책임전가식의 업무태도라해도 지나치지 않다.

복지부동(伏地不動), 눈치행정이 이렇게 퍼져나온 셈이다.

▲그래서 문희상 비서실장은 대통령을 '보고서 공해'에서 해방시켜주기로 한 모양이다.

비서실도 재량에따라 사후보고 하고 장관들도 가급적 독자적인 의사결정권을 행사하자는 주문이다.

"보고시스템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나도 관저로 들고가서 매일같이 써내려 보내게 될 것 같다"는 노 대통령의 고백이 가슴에 와닿는다.

그런데 문제는-"대통령의 고민은 말 한마디에 해결되는데 선생님들의 해묵은 숙제는 어쩌란 말이냐?"이다.

강건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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