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눈빛만 봐도 질병을 알 수 있을 만큼 소 박사가 된 최씨는 어릴 적부터 무척 소를 좋아했다.
소를 키우고 싶어 부모.형제들의 반대에도 불구, 고교 진학까지 포기한 채 남의 집 축사를 기웃거리다 19세가 되면서 집근처 20여평 부지에서 본격적으로 축산농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처음엔 나이도 어린데다 경험도 부족해 기르던 송아지 절반을 설사와 폐렴으로 죽이는 실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자연사료를 구하기 위해 산과 들로 풀을 찾아 다녔다.
최씨의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10여년 만에 축사 150여평에 어미소만 40마리가 넘는 부농의 꿈을 이뤘다.
그러나 부농의 기쁨도 잠시, 87년 소파동을 맞아 한순간에 전재산을 날리면서 좌절감에 사로잡혀 축산을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부인 김남숙(43)씨는 "소 말고는 희망을 걸 데가 없다"며 "힘든 일을 함께 할테니 끝까지 한길로 나가 보자"며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이후 15년, 지금은 1만여평의 초지에 1천평이 넘는 축사에서 종자개량된 고등 등록우(고품질의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거세한 수소)도 100마리가 넘고, 암소 등록우 등 어미소만도 총 250여마리나 된다.
특히 지난 98년 소 파동 당시 다른 축산농들은 모두 소 사육두수를 줄였으나 최씨는 냇가나 주변 야산 등지에서 풀.옥수수 등 조사료(자연사료)를 생산하며 사육비용을 절감, 끝까지 사육두수를 유지했다.
"축산물 시장이 완전 개방되는 시점에서 외국산 고기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고급육 생산밖에 없다"는 최씨는 "이제 축산도 과거의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과학적인 기반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최씨의 남훈농장에는 전국 각 대학과 축협 등지에서 매달 4, 5팀이 찾아오는 등 견학 농민들로 붐비고 있다.
또 이런 성공담이 알려지면서 축협중앙회가 수여하는 석탑산업훈장을 비롯, 농수산부 장관, 도지사 표창 등 각계 각층으로부터 수십회에 걸쳐 축산발전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늘의 성공은 아내 공이 큽니다.
그래서 농장 이름도 아내의 이름 중간자와 제 이름 끝자를 넣어 남훈농장이라 지었죠". 활짝 웃는 최씨의 얼굴에서 우리 축산의 밝은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거창.조기원기자 cho1954@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