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이민 100년...(4)멕시코-정체성 찾기

입력 2003-03-17 09:13:51

빼어난 자연환경과 찬란한 고대문화가 어우러진 이 지역 한인사회에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는 한국감리교 조남환(46) 목사. 유카탄의 주도(州都)인 메리다에 있는 그의 집에서는 매달 첫째 주 화요일 저녁에 메리다 한인단체인 '코르멕스(Kormex)회'의 월례회가 열린다.

일요일엔 한인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한글교실도 열린다.

취재팀이 찾아간 날 40~60대 연령층의 이민 3, 4세 한인회원 15명이 조 목사 부부와 함께 3시간에 걸친 한글수업에 이어 가정형편이 어려운 동포에 대한 구제사업과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문제 등을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아마토 코로나 디아스(54·멕시코중앙은행 과장) 한인회 부회장은 "현재 이민 1세대는 모두 세상을 떠났고 부모들에게서 한국어를 배운 나이 많은 1·5세와 2세들도 몇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면서 "조금이라도 한국말이 가능한 순수 한인혈통이 크게 줄면서 한국어를 사용할 기회도 없어 한글은 곧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며 한글수업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어머니가 멕시칸이어서 어려서부터 한국말을 모르고 자랐다는 코로나씨는 뜻있는 후손들 일부가 한국어를 배우고 있으나 아주 간단한 인사말만 할줄 아는 '왕초보' 수준이라며 부끄러워 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한인 회원들이 조 목사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 등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한국말을 가르쳐 주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는 지 자문을 구하는 모습은 조상의 나라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아야 겠다는 열의로 가득차 취재팀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이들은 회의를 끝낸 뒤 조목사의 부인 장선례(45)씨가 쌀밥과 김치, 김, 만두, 간장을 메뉴로 차려놓은 저녁상에 둘러앉아 평소 매우 익숙한 듯 순식간에 맛있게 먹어치웠다.

코로나씨는 "메리다의 한인들은 한국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집에서 김치와 국수, 고추장, 된장, 콩나물, 장조림 등 음식을 자주 만들어 먹는다"며 "김치의 경우 적당한 재료가 없어 양배추에 고춧가루를 묻히는 정도여서 진짜 한국 맛은 안난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민 초기부터 선조들은 고국을 그리워하며 한국음식을 해먹고 자식들에게 전수해 현재 메리다와 멕시코시티 등 주요 도시의 후손들 상당수가 고국음식을 즐기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한국에서 온 부채 볼펜 열쇠고리 등 한국 것이면 다 좋아한다"고 말했다.

코로나씨의 큰 아버지 고흥룡(아순시온 코로나 김·98)씨. 멕시코 이민 직후인 1905년 8월 15일 애니깽 농장에서 태어난 그는 한인사회의 최고령자로서 이민사의 산증인으로 추앙받는다.

길에서 넘어져 다치는 바람에 거동이 불편한 고씨는 "젊을 때 주위에 한국 여인이 없어 마야족과 혼인한 것을 후회하며 살았다"며 한국말이 서툴지만 젊은이들에게 한글과 한국음식, 경로사상 등 전통문화를 전하고 있는 순수 '대한사람'인 우리 늙은이들마저 죽으면 한인문화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어지고 '대한의 피'도 끊기게 돼 슬프다며 광복 이전의 서울말씨로 느리게 말을 이어갔다.

그는 어릴 때 애니깽농장과 메리다 한인회의 한글학교에서 한국말을 익혔으며 지금도 고국말을 잊지 않으려고 1933년 미국에서 발간된 한글판 성경책이 너덜너덜 헤어질 정도로 읽고 있다고 한다.

그는 "조 목사와 한인회의 노력으로 한국의 맥이 눈물겹게 이어지고 있다"면서 "한인들의 정체성과 결속력을 높이기 위해 누가 번듯한 한국학교와 교회를 세워주면 좋겠는데 간혹 방문하는 한국과 미국의 동포들은 한번 왔다가면 그만이고, 멕시코시티의 한국대사관도 우리 행사에 인사차 대표자만 보내는 것이 고작"이라고 침울해했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메리다 한인사회가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남다르다.

한인회는 매년 3·1절 기념식을 거행, 애국가 제창과 만세삼창에 이어 한국음식을 나눠 먹으며 민족혼을 심는다.

인구 100만명인 메리다의 한인회 회원은 중산층인 10여명 뿐이고 전체 한인도 고작 300여명인데다 유카탄 전역을 통틀어도 한국계는 1천200~3천여명에 불과하지만 무려 700~900여명이 3·1절 행사에 한복 등을 입고 참석할 정도로 열성적이라는 것. 이민 6세인 빅토르 마누엘(18)군은 "엄마 아빠 모두 혼혈이어서 멕시코 아이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지만 나는 '코레아노'로 불리는 한국인"이라며 "한국이 멕시코보다 잘 살고 작년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른 것을 보면 우리민족은 정말 재주가 많고 대단해 무척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메리다와 멕시코시티 등 큰 도시의 일부 한인 후예들은 부모들의 피땀과 눈물에 힘입어 대학까지 나와 공무원, 의사, 변호사, 교수, 사업가 등 고급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누리는 가운데 한국인임을 자각, 민족적 동질감을 키워가고 있다.

가난과 일제의 폭압에서 벗어나려는 일념으로 이역만리 미지의 땅, 멕시코를 택했던 98년 전 한인들의 꿈은 일부 후손들에 의해 현실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고씨 등 중·노년층의 2, 3세 후손들은 "부모의 고향에 일가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어 만나보고 싶지만 대부분 경제사정이 허락지 않는다"며 한국정부가 고국방문이나 이산가족 상봉을 주선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강병균기자 kbg@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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