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정상이오' '신경성이니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오'. 의사가 갖가지 첨단 장비를 들이대 검진을 마친 후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머리는 여전히 깨질 듯 아프고, 당장 심장이 터질 듯한 환자는 한둘이 아니다.
일부 동네 병원에서는 '내일 나오시오, 모레도 나오시오. 매일매일 나오시오' 라는 의사의 처방을 받는 환자들도 많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픈데 '정상이다'는 말을 반복해 듣거나 병명도 모르고 낫지도 않는데 '내일도 모레도, 매일매일 나오시오'라는 말을 들을 때 환자는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소문을 좇아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닥터 쇼핑'을 하거나 침도 맞고 한약도 먹고 심지어 굿도 한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의사 개인의 자질이나 능력 문제, 경영상의 문제 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 현행 의료시스템과 환자들의 의료불신도 이런 문제를 가중시키고 있다.
◇자질·경영 문제=소규모 소아과 혹은 내과들은 가정의학과, 이비인후과 진료를 겸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의사는 모든 질환을 치료할 수 있어 법률적 문제는 없지만 전문성이 떨어지고 장비도 부족하기 십상. 일부이기는 하지만 경영상의 문제로 "죽을병에 걸린 환자가 아니라면 붙들어 두는 의사들도 있다"고 몇몇 전문의들은 털어놓는다.
의료인의 양심에 맡길 뿐 어쩔 도리가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 환자들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병원을 찾는 것이다.
중이염에 걸린 4세짜리 딸을 4개월 동안 병원에 데리고 다녔다는 한 아버지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다른 병원에 갔더니 '멀쩡한데 왜 병원 다녔느냐?'고 되물었다고 이 아버지는 전했다.
이와 반대로 위험 부담이 있다 싶으면 무조건 큰 병원으로 보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종합병원은 늘 북새통이고 정작 치료가 급하고 고통이 심한 환자들이 몇 시간씩 대기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또 종합병원의 경우 환자가 고통을 호소해도 '정상이다.
문제없다'고 단언하는 경우도 많다.
첨단 기기를 동원한 검사결과 이상이 없으면 그만인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외과 전문의는 "현대의학의 가장 큰 단점이 '질병' 아니면 '건강'의 이분법으로 진단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법률과 문제점=현행 의료업의 광고 규제는 매우 엄격하다.
현재 의료광고의 범위는 △ 진료담당 의료인의 성명·성별 및 그 면허의 종류 △전문과목 및 진료과목 △의료기관의 명칭 및 그 소재지와 전화번호 △진료일·진료시간 △ 응급진료 안내에 관한 사항 등으로 한정돼 있다.
결국 환자(소비자)는 자신을 진료하는 의사가 외과의사라는 사실을 알 뿐 유방암 전문의인지, 맹장 전문의 인지, 항문 질환 전문의인지 알 도리가 없다.
피부과나 정신과 등 다른 과도 사정은 비슷하다.
다양한 피부 질환이나 정신 질환 중 특정한 질환만 진료하겠다고 밝히는 것은 현행 법률 위반이기 때문이다.
결국 정보를 얻지 못한 환자들은 소문을 좇을 수밖에 없고 이른바 '닥터 쇼핑'이라는 가시밭길에 오르게 된다.
한 피부과 전문의는 "광고를 낼 경우 의사가 의사를 고발한다"고 말한다.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가 유사 업종의 전문의에게는 '손님 빼앗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새로 개업한 전문의들은 '학문 혹은 탕문, 창문 외과'라는 식으로 자신이 항문질환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임을 알리는 편법을 썼다.
또 신문 잡지 등 인쇄매체에 기고하거나 방송에 출연, 특정한 질병에 대해 소상히 알림으로써 자신이 특정한 질병에 전문의임을 암시하는 방법을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환자는 소비자이며 소비자는 생산자가 내놓은 상품이 어떤 상품인지 알 권리가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의료광고는 대폭 허용될 것으로 보인다.
의료법 개정을 통해 이르면 올 4월부터 현행 의료법상 금지되는 의료인 경력광고 및 수술건수, 분만건수, 병상이용률 등에 대한 광고가 가능해질 전망이기 때문이다.
또 인터넷 홈페이지에 건강상담도 허용될 예정이다.
이 같은 의료광고에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허위·과대 광고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또 불공정한 경쟁이 의료의 질 저하를 불러올 수 있고 경쟁 의료기관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걱정의 밑바탕에는 사람의 목숨과 건강을 다루는 의료행위는 다른 상품과 달라 시장경쟁 논리가 적용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과다한 광고경쟁으로 인한 비용이 고스란히 소비자들에게 떠넘겨질 것이란 지적도 있다.
◇시스템 부재=개원을 앞둔 한 전문의는 "우리나라에 의료기관의 수준을 평가할 객관적 잣대가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미국의 경우 전국 병원의 수술성적, 성공률, 장비 등을 조사해 순위를 공개한다고 말한다.
일본에서도 조만간 병원 등급을 평가하는 회사가 등장할 예정이다.
이 회사는 병원의 안정성·장래성·진료수준 등을 5단계로 구분하고 병원 측이 희망할 경우 등급을 공개할 예정이다.
보건복지부도 의료법 개정을 통해 이 달 31일부터 종합병원 및 100병상 이상 병원을 대상으로 의료인 및 의료 관계인의 환자 수에 대한 비율 및 각 인원수, 수술 및 분만건수, 환자의 평균재원일, 병상이용률에 관한 사항, 의료인의 세부 전문분야경력(6개월 이상 해당경력), 요양병상·개방형 병원운영에 관한 사항 등을 평가해 그 결과를 일반에 알릴 예정이다.
그러나 환자들이 흔히 찾는 중소규모 병원의 평가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한편 병원 등급 평가에 대해 지방 의료인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
지금까지 정부의 지원이 중앙에 집중돼 있었고 따라서 서울과 지방은 의료수준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갑자기 병원 등급을 평가하고 공개할 경우 지방의 중소 병원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정의학과'로 대표되는 '지침센터'가 없는 것도 환자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환자의 증상을 파악해 어떤 병원부터 어떤 순서로 검진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해줄 기관이 없는 것이다.
종합병원도 역할 분담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종합병원의 가정의학과가 환자들을 분류해 검진이 필요한 과로 보내기보다 자체적으로 환자를 확보하는데 열을 올리기 때문이다.
또 외과 수술 후에는 대부분 재활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외과의가 재활 의학과에 환자를 보내는 경우는 드물다.
여기에는 '무슨 이중 삼중 치료냐'는 환자들의 인식도 한몫을 한다.
결과적으로 재활 의학과는 자체적으로 환자를 확보해 치료하는 식의 '기형적'인 의료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종합병원 내에서도 각 과별로 환자 다툼이 벌어지는 셈이다.
몇 해전 미국에서 재활의학 전문의 자격을 따고 귀국한 한 의사는 이 같은 기형적인 국내 종합병원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해 미국으로 돌아가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대체 의학 분야와 '토털 캐어 시스템' 부재도 문제로 지적된다.
현대 의학이 담당하지 않는 부분, 예컨대 접골원·활법원·침구사·발 전문의 분야 등이 방치돼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일부이긴 하지만 제도적 교육을 받지 않고 아버지 혹은 이웃집 아저씨에게 배워서 의료행위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미국의 경우 발 전문의, 침구사, 카이로프락틱 닥터 등을 모두 교육과 인증 시험을 거쳐 제도권으로 끌어넣고 있다.
난치병 환자를 위한 '토털 캐어 시스템'은 유럽 등에서 도입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환자의 생활양태를 면밀히 파악하고 음식물 섭취·생활습관 등에 관한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는 것이다.
질병이 발생하기 전에 예방하거나 혹은 평생 안고 가야할 질병이라면 악화를 예방하는 미래형 의료행위인 셈이다.
'토털 캐어 시스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몇몇 의사들은 "칼로 병을 다스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어쨌거나 환자들은 일단 진료를 받기 시작했다면 의사를 믿고 따르는 것이 치료의 왕도라는 게 공통된 지적이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우리 아기가 태어났어요]신세계병원 덕담
"하루 32톤 사용"…윤 전 대통령 관저 수돗물 논란, 진실은?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