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와이 취재를 다녀 왔던 매일신문사 취재팀은 본래 목적에는 없었지만 그곳의 도로 가드레일이 하도 인상적이어서 찍어왔다며 사진을 한 장 제시했다.
사진 속의 가드레일 기둥은 무시무시한 H빔으로 돼 있었고, 길 가를 막아주는 판재도 H빔이었다.
가느다란 쇠파이프를 깊지도 않게 박고는 양철같은 판재로 가려 놓은 우리 가드레일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때문인지 대구에서는 높다란 주변 도로를 달리던 자동차가 가드레일을 부수고 드물잖게 반지하 구간의 신천대로로 뛰어 내려 죄없는 운전자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수출용'이라면 맥을 못춘다.
승용차도 마찬가지. 내수용과는 뭔가 다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추측은 정확한 것으로 속속 드러났었다.
차를 사 가는 나라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높은 안전 기준을 요구, 국내에는 양철 조각같은 자동차를 파는 회사들조차 수출 때는 매우 튼튼한 차를 선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때문에 외국에 살다 귀국하는 사람 중에는 그곳에서 산 한국산 자동차를 싣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번 대구 대참사의 주인공이 됐던 전동차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조희욱 국회의원은 지난 1일 "인도.터키.그리스 등의 전동차 1량 가격은 16억5천만~18억원에 달하지만 대구 지하철 (2호선) 전동차 값은 7억9천600만원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우리보다 살기가 낫지도 않은 나라들에서는 전동차가 그렇게 비싼데 우리 것은 어떻게 이렇게 쌀까? 절약 기술이 뛰어나 그런 것일까?
터무니 없는 억측이다.
양측이 요구하는 안전성 확보 기준이 달라 값까지 차이 난 것이다.
수출용과 내수용 전동차는 내부자재 질에서 엄청나게 다르다.
수출용은 바닥재는 물론 객차 연결부에도 모두 불연재를 사용한다.
벽면 내장재로도 불연재를 쓴다.
그러나 내수용 전동차의 내장재 소재는 FRP이다.
이것은 유독가스를 내뿜으며 녹아내린다.
결국 문제는 안전 기준이다.
미국.영국 등은 국제 기준인 '화염 성능 시험규격'을 채택해 내연성.화염전파.연기밀도.연기독성 등 4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토록 요구하고 있다.
화염전파 속도, 유해가스 발생량, 연기밀도 등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것이라야 전동차 내장재로 쓸 수 있도록 규제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사람이 손상 없이 15분 동안 견딜 수 있는 가스의 농도를 측정하는 독성시험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프랑스도 유해가스의 독성기준을 정해놓고 있다.
반면 국내 전동차 내장재에 적용되는 기준이라고는 '자기소화성' 뿐이다.
불이 붙었을 때 저절로 꺼지게 하는 성질만 갖추면 자재에 문제가 없다는 것. 하지만 내연성의 단계에서 자기소화성은 불연성, 난연성에 이은 최하위 것이다.
그 밑에는 '가연성' 밖에 없다.
내수용에서는 유독가스에 대한 규정도 전무하다.
2000년 3월 건교부가 만든 '도시철도 차량 안전기준에 관한 규칙'은 방염 규격을 단순히 '불에 타지 않는 재질' '불에 타기 어려운 재질' 등으로 추상적으로만 규정했다.
도시철도 표준사양에도 내장재 방염기준에 관한 내용은 찾기 힘들다.
전동차에 불이 났을 때 번지는 정도를 가리기 위한 '화재 하중기준'도 국내에선 검토된 적 없다.
단위 면적당 가연성 물질이 포함된 정도를 말하는 이 기준은 기본적인 사항으로 인정돼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화재가 더 자주 문제되는 건축물 자재에 대한 것도 예외가 아니다.
안전 선진국에서는 유해 가스를 방출하는 합성수지 사용은 철저히 규제한다.
미국에서는 각종 가연재의 일산화탄소.이산화탄소 양을 측정해 등급을 부여한다.
플라스틱 제품 사용량은 벽과 천장 면적의 10%를 초과할 수 없도록 했다.
프랑스는 화재 시험을 거쳐 플라스틱 제품에서 나오는 독가스량을 ㎥당 질소 5g 염소 25g 이하로 규제했다.
영국에서는 플라스틱류 제품은 반드시 인화성 시험을 거치도록 의무화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연기 유독성 평가의 기본이 되는 단위 가연물당 가스 생성 비율 등에 관해서조차 정확한 실험을 하지 않은 실정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다른 나라는 그렇게 엄한 장치들을 만들어 놓고 있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허술할까? 앞만 보고 달려야 했던 시절이 있었기때문일 것이다.
그때는 안전 같은 것은 귀찮은 시비거리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기본을 다지지 못한 질주는 공허한 것이어서, 더 이상의 달리기를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앞으로도 그러고 있어서는 지금까지 달려온 길마저 허사가 되게 할 것이다.
이제 수출용이라고 탐내지 않아도 될 정도까지 내수용에 대한 안전기준을 높여야 한다.
앞으로 달려 나갈 태세는 잠시 접어둬야 한다.
뒤를 돌아볼 시기이다.
기본을 다시 점검하고 다질 재정비의 시대를 맞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나마 쌓아 올렸던 탑도 무너져 내릴 것이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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