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는 인류 역사의 출발점

입력 2003-03-07 09:27:18

▲걷기의 역사(김정아 옮김/민음사 펴냄)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마음은 언제나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

걸음을 늦추기 위해서 책을 가지고 갔다'(장 자크 루소의 고백론)

걷기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도 있다.

그리고 '세사람이 걸어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라는 옛사람들의 말도 있고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이란 흘러간 노래가사도 있다.

조상들에게 있어서 '걷는 것'은 삶의 지혜와 진리를 깨닫게 해 주는 기회를 제공했고 외롭고 괴로울 때 무작정 걸음으로써 마음을 달래는 훌륭한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인간의 걷기행위의 의미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동서양 모두에게 소중한 경험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 역시 인간이 두발로 걷게 되면서 비롯됐다고 주장할 정도에 이르게 됐다.

'걷기의 역사'(김정아 옮김·민음사 펴냄)는 곧 우리 인류역사의 출발점인 셈. 인류가 두 발로 직립보행을 시작함으로써 보다 멀리 먹이를 구하러 다닐 수 있었고 교통수단이 발달되기 전 걷기는 인류문명 발달과 전파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걸으면서 사유하기 시작했고 사유하면서 소위'철학'이란 학문이 생겨났고 걷게 되면서 여행과 순례도 이뤄졌다.

철학에서 말하는 소요학파(Perpatetics)는 그리스어로 '주변을 걷다'라는 의미이고 영어로 소요학파 학도(Peripatetic)도 '습관적으로 먼 길을 걷는 사람'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어 걷기와 철학의 관계를 잘 나타낸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낸 '걷는 문화'는 근대가 되기 전까지는 남성만들의 점유물로 됐고 일부 유럽국가에서는 여성들이 밤에 함부로 걸어다닐 경우 창녀로 취급되어 경찰서에 잡혀가 조사를 받는 등 걷는 것이 남녀차별의 모습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러한 걷기는 평화와 저항의지를 나타내는 훌륭한 수단으로 활용됐고 근대·현대로 넘어오면서 정치적·경제적 의미를 나타냈다.

인도에서는 간디가 비폭력으로 걷기를 통해 식민지배자인 영국에 대항하며 세계여론을 형성하면서 걷기는 그에게 가장 비폭력적이면서 인도독립을 위한 보편적 수단이자 방법이었다.

미국 핵실험이 진행된 네바다주에서 이뤄진 네바다 사막체험 행사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을 추모하는 대규모 걷기 행진, 최근들어 에이즈 걷기대회와 유방암 걷기대회 등이 좋은 사례이다.

프랑스를 비롯, 유럽에서는 도시거리를 중심으로 한 행진이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시민행진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데 일조 했고 체코에서는 프라하의 봄을 가져다 주는 효과를 주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텐안먼(天安門)에서 민주화 운동을 탱크로 저지하는 유혈의 현장이 되는 등 걷기가 정치적 의미를 보였던 것이다.

이처럼 20세기의 걷기는 저항과 의지의 표현수단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걷기가 건강을 위한 훌륭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교통수단 발달과 이동거리의 폭이 넓어짐에 따른 걷는 공간의 상실로 러닝머신으로 걷기를 계속하거나 달리기로 건강을 지키려 하는 것이 오늘의 모습이다.

'걷기의 역사'는 인류 역사가 걸어온 과정을 걷기를 통해 조명해 보는 독특한 책이다.

예술·문화 비평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저자 레베카 솔닛은 이처럼 '걷기의 역사'를 통해 "걷기는 살아있음에 대한 강렬한 체험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며 걷기의 소중한 경험을 펼치고 있다.

정인열기자 oxe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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