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에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책 속에 끼어 있었던가?…〈중략〉…순결한 이성으로써 우리는 지금까지 배운 지식을 밑바탕으로 하여 일장의 궐기를 하려 한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1960년 2월 28일 낮 12시 55분, 당시 경북고 학생부위원장 이대우 등이 조회단에 뛰어올라 떨리는 목소리로 이 결의문을 읽는 동안 흥분이 고조된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반독재의 횃불은 이처럼 대구에서 처음 불타올랐다.
이어 경북고·대구고·경북여고 등의 학생 1천200여명은 '학원의 정치 도구화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구를 민주화 함성으로 가득 채웠다.
▲이 의거는 오후에 열릴 예정인 민주당 장면 후보 강연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일요일인데도 등교 명령을 내린 당국에 대한 항의와 분노의 표출이기도 했다.
이 때는 1952년의 발췌 개헌, 54년의 사사오입 개헌, 58년의 진보당수 처형 등 권좌 유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이승만 정권의 실정에 식상한 때였으며, 제4대 대통령 선거(3월15일)를 앞둔 예민한 시기였다.
이 날 학생들은 출동한 경찰과 충돌, 20여명이 부상했고 200여명이 연행됐었다.
▲2·28 민주운동은 이 같이 고교생들이 주체이고, 계획적으로 시위를 조직한 점에서 근대 민족운동의 요건을 갖춘 학생운동이었다.
우리 역사상 6·10만세 사건, 광주 학생운동 등으로 이어지다 6·25로 단절된 뒤 복원된 학생운동이며, 전후 우리나라 학생운동의 효시였다.
더구나 이 의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으로 마침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으며, 한일수교반대와 70, 80년대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늘은 2·28 민주운동 43주년을 맞은 날이다.
이 운동은 우리의 민주화 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역사적인 의거였으며, 오랜 세월 동안 그 날 뿌린 민주·민족운동의 그 뜨거운 정신은 숱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역사 발전의 저류로 도도히 흐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4·19혁명에 가려 제대로 평가되지 못해 온 감도 없지 않다.
아무튼 그 뜨거운 정신의 씨앗이 새롭게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어 열매를 맺는가 하면, 그 숭고한 정신이 후세에까지 널리 전해져 그 기개와 정신이 청사에 길이 빛날 수 있기를 염원해본다.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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