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칼럼-어느 소방대원의 이야기

입력 2003-02-24 13:37:19

-먼저 지하철 참사로 유명을 달리하신 희생자들과 유족들께 삼가 애도를 드린다.

부디 하느님의 애련하신 사랑으로 천국에서나마 영복을 누리시기를-

대구 지하철 참사,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참상의 실상과 원인이 하나하나 드러날수록 유족들과 국민들의 가슴에는 슬픔을 넘어 더 큰 분노를 치솟게 했다.

더 무슨 위로나 질타의 필설(筆舌)이 필요할 것이며, 억장이 무너지듯한 비탄속에 책상머리 논평이나 다짐의 글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이제 똑같은 지하철에 세번씩이나 크고 작은 참사를 당한 이 느슨함과 썩은 정신 그리고 망각의 죄업을 다시는 되풀이 말자는 애절하고 간절한 심정에서 오늘은 객설 대신 덴마크의 어느 젊은 소방관의 위난구조 이야기로 이 난(欄)을 대신 했으면 한다.

재난이 닥쳤을때 임무와 사명감, 지혜 그리고 또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게 하는 교훈적인 일화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1953년 11월13일 새벽 3시, 덴마크 코펜하겐 소방단의 재난 신고센터 전화벨이 요란스레 울렸다.

야간 근무중이던 소방관 에릭은 황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소방단입니다". 그러나 거친 숨소리만 들릴뿐 응답이 없었다.

잠시후 한 여인의 신음이 들렸다.

"살려주세요, 몸을 움직일수가 없어요". "위치가 어딥니까". "모르겠어요. 어지럽고 출혈이 심해서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요". "이름이라도 대보세요". "머리를 부딪혔는지 아무 기억도 못하겠어요". 에릭은 절대로 전화를 끊지 말라고 당부해두고 다른 전화기로 전화국의 교환을 찾았으나 경비원이 받았다.

"지금 소방단과 통화중인 사람의 번호를 조사해 주세요".

"저는 경비원이어서 기술적인 것은 모릅니다".

에릭은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에릭은 여인에게 불을 켜 둔 채 있으라고 다짐한 뒤 급히 소방서장에게 전화를 걸어 한가지 구조 방법을 제안했다.

그러자 서장은 반대했다.

"그건 미친 짓이야. 시민들이 원자폭탄이라도 찾는 줄 오해할거야. 찾아낼 수 없는 여자 한명때문에 50만명이 사는 도시에서 한밤 중에 그 난리를 피울 수는 없네. 더구나 그 여자와 전화를 계속 연결해 놓고 있으면 다른 신고도 못받네. 다른 곳에 화재라도 나면 어쩌려는 건가".

그러나 에릭은 소방관 훈련시절에 배운 '생명구조가 최우선'이라는 임무를 떠올리며 서장에게 애걸했다.

"더 늦어지면 출혈이 계속됩니다". 잠시후 서장이 대답했다.

"좋아 한번 해 보세". 15분후 스무대의 소형 소방차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시가지 구역으로 모여들었다.

소방차들은 각 구역별로 나뉘어배치돼 조금씩 움직이며 사이렌을 울려댔다.

에릭은 수화기에 바짝 귀를 대고 여인의 가쁜 숨소리를 들으며 수화기속에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여인의 전화기에서도 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에릭이 즉시 보고했다.

"서장님 들립니다".

서장이 곧바로 무전기를 통해 소방차들에게 지시했다.

"1번차량 사이렌 끄시오".

에릭이 다시 보고해왔다.

"아직 수화기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립니다".

서장이 다시 지시했다.

"2번차량 사이렌 끄시오".

차량 차례대로 사이렌 소리를 꺼나갔다.

드디어 12번째 소방차가 사이렌을 끄는 순간, 여인의 전화기에서도 사이렌 소리가 꺼졌다.

에릭이 기뻐 소리쳤다.

"이제 사이렌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서장이 명령했다.

"12번차량 사이렌을 다시 울려보시오".

그러자 여인의 수화기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서장이 다시 명령했다.

"12번차량 사이렌을 켠채 오던길로 되돌아 가보시오".

에릭이 보고해왔다.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크게 들립니다.

12번차량 구역 거리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12번 차량, 불빛이 비치는 창문을 찾으시오".

그러나 12번 소방차에서는 난감하다는듯 불평스런 무전보고를 해왔다.

"수백개의 집들이 모두다 불이 켜져있습니다.

모두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구경을 하고있어서 찾을수가 없습니다".

서장이 어이없다는듯 야단쳤다.

"확성기를 이용하라!"

에릭은 수화기를 통해 확성기에서 울리는 말을 감격스레 들을 수 있었다.

"시민 여러분, 우리는 지금 생명이 위독한 한 여인을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집의 불을 모두 꺼주십시오".

그러자 순식간에 그 구역의 모든 집들의 창문에 불이 꺼지고 거리가 깜깜해졌다.

그 가운데 단 한집에서 불빛이 새나오고 있었다.

잠시후 에릭은 수화기속에서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소방대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의식은 없지만 아직 맥박은 뛰고 있다.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하겠다.

그녀는 무사할 것 같다".

'엘렌 손다르'-그녀는 보름후 의식을 찾고 기억력도 돌아왔다.

('당신을 바꿀 100가지 이야기'중에서)

다시 한번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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