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 자동시스템이 '죽음' 더 키웠다

입력 2003-02-19 12:17:03

18일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는 재난방지시스템 마비, 탈출구 봉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불이 난 전동차 맞은편에 정차한 1080호 전동차의 경우 사고 발생 뒤 수동조작을 제대로 하지 않아 10분이나 지나서야 출입문을 열거나 일부 객차는 아예 출입문 자체를 열지 못해 엄청난 승객 피해를 불러온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재난방지시스템 마비

이날 오전 9시55분쯤 중앙로역에서 안심 방향 1079호 전동차(기관사 최정환·33)에 불이 난 지 2분 뒤 반월당~신천역 구간에 전기공급이 끊겼고, 거의 비슷한 시각 대곡 방향 1080호 전동차(기관사 최상열·39)가 중앙로역에 진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지하철 1호선 영대·반월당·신천변전소 등 3개 변전소에서 공급하는 전기가 끊기면서 지하철공사 통신사령실 모니터, 전력 및 운전사령실 등 종합사령실 내 대다수 시스템이 마비돼 전동차 화재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전력설비를 운용·통제하는 전력사령실 경우 단전 이후 영대변전소 전력은 50초만에 복구했으나 반월당~신천역 구간에는 별다른 손을 쓰지 못했으며, 비상전력 가동 여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동시에 각 역에 설치된 22개의 폐쇄회로(CC) TV 중 중앙로역 CCTV 작동이 단전과 함께 멈춰 누전이나 화재로 인해 단전될 경우 전력사령실, 통신사령실 등 재난방지시스템이 무용지물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지하철공사 곽정환 종합사령팀장은 "사고 당시 전력사령실 시스템이 다운된 데다 중앙로역 역무원이 '역내에 불이 났다'는 전화를 한 후 통신이 두절돼 전동차에 불이 났는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박무훈 전력사령실 과장도 "단전조치는 종합사령실의 지시에 따라 하지만 이번엔 별다른 지시가 없었던 것으로 봐 누전때문일 가능성이 높다"며 "누전에 따른 단전이 발생하면 재난방지시스템 가동이 제대로 되지 않고 비상전력 가동여부도 파악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대구지하철공사 측은 사고가 난 두 전동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할 당시 찍힌 CCTV 화면의 녹화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자동운행 시스템 맹점

사고가 난 전동차의 자동운행 시스템은 화재 등 각종 재난에 노출된 채 사고 예방장치가 전혀 뒷받침 되지 않아 언제라도 대형참사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대구 지하철의 전동차 운행시스템은 자동 열차 운전장치(ATC, Auto Train Operation)와 자동제어장치(ATC, Auto Train Control)의 혼합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대구지하철공사 이지우 검수운용담당 과장은 "대구지하철은 전동차가 선로를 통해 스스로 움직이도록 돼 있고 역에 도착하면 전동차 하부에 있는 기계장치가 역내 선로에 설치된 센서와 감응해 자동 정차한 후 출입문을 여닫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전력 공급이 끊길 경우 발생하는 운행 불능 상황에 대한 대처 방법이 없다는 것이 큰 맹점으로 드러났다.

이 과장은 "이 시스템의 장점은 인력 절감, 운행 안정성 등이지만 화재 등 외부 충격으로 전력 공급이 끊길 경우 전동차는 그 자리에서 운행 기능을 상실한다"고 말했다.

대구지하철공사 정경일 기술담당 과장은 "전동차 단전 때는 자체 비상전력이 전동차에 공급돼 수동식 문개폐와 내부 비상등 작동 등이 가능하고 통상 2시간 정도는 그런 능력이 유지된다"고 말했다.

◇수동조작 지연

이번 사고에서 정작 불이 난 전동차보다는 맞은편에 정차한 1080호 전동차 승객들의 피해가 훨씬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상당수 목격자들은 대곡 방향의 1080호 전동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는 순간 단전돼 전동차 내 전등은 물론 역 구내 전등이 모두 꺼졌고 출입문이 잠깐 열렸다 곧바로 닫힌 뒤 10여분간 그대로 있음으로써 피해가 커졌다고 말했다.

1080호 전동차 맨 뒤칸에 탔던 류호정(30·대구 율하동)씨는 "중앙로역 도착순간 전등이 꺼지면서 문이 잠깐 열렸으나 연기가 새 들어오면서 곧바로 닫히는 바람에 승객들이 전동차안에 갇혀 아비규환이었다"고 말했다.

류씨는 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출발합니다'란 안내방송이 나온 뒤 10분쯤 후에 '사고가 났으니 밖으로 대피하십시오'란 안내방송과 함께 문이 열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고발생 직후 본보 취재진이 현장을 확인한 결과 1080호 전동차 출입문은 대다수 닫혀 있는 상태였으며 일부 출입문만 열렸거나 부서져 기관사 최씨가 수동개폐 버튼을 작동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 경찰은 정확한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1080호 전동차 기관사 최씨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

◇탈출구 봉쇄

이날 화재가 발생하자 중앙지하상가 지하 1층에 설치된 4개 방화벽이 작동되면서 일부 승객들은 방화벽 때문에 탈출구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기도 했다.

이 곳 방화벽은 지난 2001년 설치됐으며 화재가 날 경우 지하내부의 연기 및 화재 확산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불이 나면 자동으로 문이 닫히도록 돼 있다.

방화벽은 벽 틈 사이로 사람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계돼 있으나 미처 통과 가능 여부를 알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상당수는 50m가량 떨어진 지상통로까지 빠져나와야만 했다고 생존자들은 전했다.

사회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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