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에서 일제시대에 걸치는 동안 대부분의 언론인들은 문인으로도 활약했다.
문인 치고 언론계에 몸을 담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을 정도로 언론인과 문인은 동일시됐다.
1904년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를 비롯 구한말에 발간되던 민간신문들이 연재소설을 다투어 싣게 됨에 따라 신문과 신문학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기자들이 쓴 신소설은 1910년대 이전까지는 무기명이나 필명으로 발표됐을 뿐이다.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의 '혈의 누'도 그가 '만세보' 주필로 있으면서 1906년에 연재했던 작품으로 알려진다.
▲당시 유일한 우리말 신문이었던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우리 문화 말살 정책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학의 최종 수호자 역할을 했다었다.
총독부 기관지이기도 했으므로 정치 기사로는 관심을 끌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학예 기사, 특히 문학에 비중을 둘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 때문에 숱한 문재들을 배출하는가 하면, 우리 문학을 찬연하게 꽃피우기도 했다.
▲1920년대 이후 신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두각을 드러낸 여성 소설가는 임옥인 강경애 백신애 최정희 장덕조 박화성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1932년 '개벽' 기자로 입사, 창작 활동의 계기를 찾은 장덕조는 그 이후 조선중앙일보 기자, 평화신문 부장, 영남일보 문화부장, 6·25 종군기자, 매일신문 문화부장·논설위원, 대한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으로 언론계에 몸담으면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작가다.
그가 17일 89세로 별세했다.
▲1914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서울 배화여고와 이화여전을 나온 그는 1932년 단편소설 '저회(低徊)'로 등단한 이래 '벽오동 심은 뜻은' '낙화암' '다정도 병이런가' 등 장편소설 90여편과 단편소설 120여편을 남겼다.
특히 1989년 75세에 작가들의 조로(早老) 현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하소설 '고려왕조 500년' 14권(원고지 2만6천장 분량)을 내놓아 문단을 놀라게 했다.
이 소설은 불꽃같은 창작열로 자식들과도 연락을 끊은 채 하루 50장에서 150장까지 써서 완성했다지 않은가.
▲우리 문단사에서 보기 드문 다작 작가였던 그의 이 같은 문학에의 열정은 과연 어디에서 나왔으며, 언론계를 떠난 뒤 오히려 그 불꽃이 더욱 뜨거워졌던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는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신봉하면서 끊임없이 빛을 가꾼 '에피큐라언'이었을까. 평소 그가 자주 주위 사람들에게 내비쳤다는 '작가의 나이는 통계 수치에 불과하다' '작가는 명함 대신 작품으로 알려지면 된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부디 다른 세상에서도 언론인으로, 작가로 끝없이 열정에 불지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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