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석이 형제'를 기억 하십니까. 10년 전인 지난 1993년 11월 30일자 본지에 '아빠 없는 하늘아래 4형제만이'라는 제하의 슬픈 겨울 아이들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생활고로 가출한 아내 때문에 술 병으로 시름하다 43세로 세상을 떠난 가난한 화전농의 아이들. 청송군 파천면의 흰눈 덮인 산골 초가에 버려져 있던 사연이었다.
소설같은 실상에 가슴 에며 매일신문 독자들은 현지로 달려가 아이들의 시린 손을 녹여 주었고, 멀리 부산에서도 정성껏 격려금을 보내 그 액수가 무려 4천여만원에 이르렀다.
익명의 독지가는 한밤중에 춘석이가 다니던 청송 송강초등학교 마당에 이들 형제에게 전해달라며 쌀 가마니를 두고 가기도 했다.
슬픈 사연에 대한 가슴 따뜻한 사람들의 감응은 인간성 상실이 난무하던 세류를 거부하고 여전히 이 땅에 사람사는 아름다움이 살아 있음을 알렸다.
그렇지만 세상은 곧 그 아이들을 잊었다.
그러던 지난달 초순. 대구의 본지 독자 한 분이 춘석이 형제의 근황을 물어왔다.
기자는 그동안의 무심을 부끄러워하며 그때 숱한 후원인들의 궁금증을 덜기 위해 이들 형제를 찾아 나섰다.
맏형인 박춘석(23)이는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해 주왕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고 있고, 둘째 태일(20)이는 안동 영명학교 졸업반, 셋째 복동(18)이는 안동생명과학고 축산과 1년, 막내 영응(14)이는 진보 진성중학교 1년에 재학 중 이었다.
이들이 이렇듯 대견스럽게 성장한 것은 청송농협 조홍래(55)과장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이었다.
1994년 후원회장을 맡으면서 기탁된 후원금 4천여만원 중 1천여만원으로 아이들에게 17평 크기의 조립식 주택을 지어주고 아예 함께 기거하며 부모 대역을 했다.
춘석이 아버지와 어린시절 친구였던 인연이 있었고 자녀들을 대구로 유학보낸 기러기 아빠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씨는 남은 후원금은 한푼도 쓰지 않고 3년만기 복리 정기예금으로 9년을 굴려 알토란 같이 살을 불렸다.
실생활비는 사회단체와 공공기관에서 출연한 장학사업비를 얻어 쓴 뒤 그 내역을 8년간 가계부로 남겼으며 적립금은 이들이 독립할때 모두 돌려줄 계획이다.
그러나 근심도 없지 않았다.
태일이 때문이었다.
태일이는 선천성 지능장애 때문에 성인이 되어도 누군가 끝까지 도와줘야 한다.
조 과장의 가슴은 시나브로 숯덩이가 되고는 했다.
그렇지만 춘석이 어엿한 성인이 됐고, 복동이가 고교를 졸업하면 태일이를 도와 축산을 하기로 하고 올 봄 그 밑천으로 암송아지 2마리를 사기로 결정해 한숨 놓이기는 한다.
"힘 닿는데까지 춘석이 형제를 계속 돕겠다"는 조 과장과 "은혜에 보답해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화답하는 형제들. 이들은 이 아름다운 인연이 10년전 정성어린 후원금을 쾌척해 주신 분들의 덕분임을 잊지 않겠다고 했다.
"대구에 사무실을 둔 태융건설이라는 회사에서는 10년째 매달 빠짐없이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고 밝힌 조 과장은, 각박한 세태에 되살아난 이 훈훈한 이야기가 언 세상을 녹이는 따뜻한 이웃사랑의 메시지로 영원히 남아있길 소망했다.
안동·정경구기자 jkgoo@imaeil.com
청송·김경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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