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 역사의 추곡수매제도 사상 처음으로 정부가 수매가 인하 결정을 했다.
과거에는 정부가 수매가를 동결해도 농민표를 의식한 정치권의 논리 덕택에 국회 심의에서는 오히려 인상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정부의 이번 2% 삭감안은 예사롭지 않다. 정부의 쌀정책 방향 대전환이란 선언적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입장이 단호한 만큼 농민들의 현실도 절박하다. 개방을 눈앞에 둔 수매가 인하에 대한 농민단체의 거센 반발과 2월 임시국회의 심의과정이 주목된다.
▨현황
현재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외국산 쌀은 국내 소비물량의 4%선. 세계에서 쌀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고 수입물량을 제한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필리핀뿐이다. 외국 쌀과 국내 쌀값의 차이도 지난해 기준으로 4.9배에 이른다.
사정이 이러하니 내년 WTO(세계무역기구) 쌀 재협상 과정에서 관세부과 유예가 좌절될 경우 국내 농가의 치명적인 타격이 불보듯하다. 쿼터제를 고집하려 해도 수입 쿼터를 대폭 늘리거나 타산업 분야의 대대적인 양보가 불가피하다.
추곡수매가 인하가 불러올 엄청난 파장을 예상하면서도 정부가 '극약처방'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곧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정부입장
안종운 농림부차관은 "2004년 WTO 쌀 재협상에 대비해 국내외 쌀 가격차를 줄임으로써 국내 쌀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쌀 과잉공급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수매가 인하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현재 진행 중인 WTO.DDA(도하개발아젠다) 협상과 2004년 쌀 재협상으로 쌀 시장 개방 폭 확대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농가의 충격 완화와 효과적인 대처를 위해 국내외 가격차를 줄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또 농가의 충격완화와 소득보전을 위해 양곡유통위원회가 건의한 대로 논농업직불금을 4천억원에서 4천800억원으로 800억원 증액 지원키로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정치권 주장
정치권은 여야 할 것 없이 "농민에게만 피해를 전가하려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정부가 농촌의 희생을 바탕으로 다른 산업을 운영하려 한다면 국회의 동의를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한나라당 이상배 정책위의장은 "정부가 올 추곡수매가를 사상 유례없이 인하키로 한 것은 황폐화된 농촌과 농업.농민 사정을 외면한 결정"이라며 쌀정책 재검토와 농업안정 대책 제시를 촉구했다.
▨전망과 대안
지난 1994년 우루과이 협상 타결과 함께 쌀개방이란 카운트 다운이 시작됐을 때부터 정부와 정치권은 농민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농업 경쟁력을 높이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FTA 상대국인 칠레의 경우 10여년만에 농업경쟁력을 국제적 수준으로 높였고, 일본도 쌀시장 개방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온 사례가 좋은 본보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농민표를 의식해 계속 미봉책만 내놓다가 이제는 마지막 코너에 몰린 꼴이 된 것이다. 경북도의 이해도 양곡관리담당은 "현 상황에서는 쌀산업의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쌀농사의 규모화와 생산비 절감을 통한 적정수준의 농가소득 유지가 시급하다"고 밝혔다.
노령 농업인의 경영이양 촉진을 위해 연금 형태의 경영이양직불제를 도입하고, 젊고 유능한 2ha 이상 전업농에 규모화 자금이 집중 지원돼야 한다는 것. 정부는 쌀생산비의 약 50%를 차지하는 토지용역비(임차료)와 금융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은퇴농가의 농지를 장기 저리로 구입하거나 낮은 수준의 임차료로 경영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농림부 관계자는 5일 "추곡수매제가 농가소득지지 등 본래의 기능이 크게 축소된 만큼 쌀을 시가에 구입해 시가에 방출하는 '공공비축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며, "쌀재고가 800만섬으로 줄어들 2005년께부터 시행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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