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진.중견작가 콩트 릴레이-아버지의 현실

입력 2003-01-25 15:01:44

승호 돌이란 핑계를 대어 사회운동 하는 친구 여덟 명을 초대하여 먹자판을 벌린 지 두 시간이 지났건만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선생님께 인사드려야 할텐데 어떻게 된 거야?" 아버지 제자였던 광욱이가 묻기도 삼십분 전이고, 정신이 온전하던 그도 이제 꽤나 취해, 화제의 도마에 오른 북한 핵 문제에 끼어 들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설전을 벌린다.

"우리도 그렇게 당해봐, 자구책으로 배수의 진을 칠 수밖에. 죽기 아니면 살기 아냐? 북한이 자존심 세워가며 잘 버텨내고 있어". 광욱이가 말한다.

"오빠, 전화 받아봐. 미국 어머님이셔". 아내가 말한다.

거실엔 친구들이 너무 떠들어 나는 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는다.

승호는 침대에서 잠들어 있다.

"오늘 승호 돌잔치 벌였다면서? 내가 있어야 상차림을 제대로 할텐데, 걔가 뭘 차려 손님 대접하는지 모르겠다". 뉴욕에서 걸려온 전화인데 시내 통화처럼 어머니 목소리가 또렷하다.

"요즘엔 시장이며 백화점에서 안 파는 음식이 어딨어요. 갈비찜이며 전붙이며 대충 사왔죠".

"그런데 네 아버진 전화가 왜 먹통이냐? 어제부터 몇 차례나 전화를 했는데. 어디 여행이라도 갔냐?"

"아, 아버지 핸드폰요? 술 취해 들어오시다 잊어버렸대요. 며칠 됐어요. 여행은 무슨 여행요. 낮엔 기원에서 소일하시고 저녁에는 약주 자시느라……".

네 아버진 술 때문에 큰일이라며, 몇 마디를 더 하시곤 어머니는 전화를 끊었다.

형수의 셋째 아기 출산에 맞추어 뉴욕으로 들어간 어머니는 그 곳에서 넉 달째 눌러앉아 계신다.

형이 웨스터 32번가에서 야채가게를 내고 있는데 형과 형수가 새벽에 나갔다 밤 늦게 돌아오니 갓난애가 안쓰러워 조금 더 돌봐주고 귀국하시겠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찾으러 나가기 위해 두툼한 점퍼를 걸친다.

아파트를 나서자 날씨가 춥다.

기온이 영하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어느덧 밤 아홉 시가 넘어 아파트 앞 차도가 휑하다.

아버지가 휴대폰을 잊어버린 날도 고주망태로 취해 아파트 수위가 우리 호실까지 부축을 해주었다.

선거가 끝난 이후 아버지의 주량이 더 는 점만은 사실이다.

이렇게 추운 날 술 취해 집으로 돌아오다 쓰러지면 동사하기가 싶상이다.

아직까지 기원에 죽치고 있을 리는 없겠다 싶어 나는 재래시장 쪽으로 걸음을 놓는다.

아파트단지 한 켠에는 아직도 옛 동네가 그대로 남았고, 주로 하층민들이 모여 살고 있다.

공단 애들이 방을 얻어 자취를 하기도 한다.

오늘 승호 돌에 초대된 학수는 그 일대 '빈민생존권대책협의회'의 간사직을 맡고 있다.

재래 시장 안, 허름한 순대국집이 아버지의 단골 술집이다.

아버지가 교직에서 정년 퇴직을 한지도 벌써 다섯 해가 흘렀다.

퇴직 후 한동안은 그래도 가든류의 불고기집이나 막창집에서 퇴직한 동료들과 술자리를 가졌더랬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 자리가 격하되어 재래시장의 어두컴컴한 골목안 순대국집이 되었다.

순대국집 안은 만원이다.

시장 장사치, 건설현장 노동자, 행상에서 돌아온 빈민촌 주민들이 도마의자에 빼꼭히 앉아 술판을 벌리고 있다.

아버지가 구석자리에 앉아 캡 쓴 아저씨와 스포츠머리한 분과 소주를 마시고 있다.

"어, 너 잘 왔다.

앉아. 노소동락 하자구".

스포츠머리한 건장한 분이 나를 먼저 보곤 도마의자를 내민다.

그 분은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기 직전 군복 벗은 육군 대령 출신이다.

기원에서 몇 차례 보았고 달포 전에는 우리 아파트에서 한차례 자고 가기도 했다.

"아버지, 오늘 승호 돌맞이 상 차리신 거 아시잖아요. 친구분들과 집에 오셔서 약주 하셔도 될텐데……. 좋은 안주도 있고요". 나는 의자에 앉지 않고 말한다.

"아버지 취하셨어. 자네가 모시고 가게. 우선 앉아. 있는 술은 비워야지".

캡 쓴 아저씨는 아버지보다 조금 연하로 기원에서 아버지와 바둑을 두는 걸 본 적이 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도마의자에 앉는다.

대령 출신이 잔을 비우고 내게 소주 한 잔을 권한다.

술상에는 벌써 빈 소주병이 세 개나 있다.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깐. 촛불시위도 좋다 이 말이야. 꽃 같은 애 둘을 깔아 뭉게고 무죄라는 게 말이나 돼? 그러나 젊은 애들은 세상을 좀 넓게 봐야지. 육니오 때 생판 낯선 이 땅에 와서 죽은 미군이 3만4천이야. 그때 미군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남한은 적화되었을 것 아냐? 미군 철수? 말이나 되는 소린가? 우리는 한민족이기에 북한은 절대 남한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육니오전쟁은 누가 일으켰어? 그 사과나 하고 미국과 싸우려면 싸워. 미국이 몇 만리 밖인데 싸우긴 어떻게 싸우겠다는 거야". 캡 쓴 아저씨가 나를 본다.

"자네, 내 말 어디 틀려? 자네들은 육니오 안 겪어봤지?"

"쓸 데 없는 소리 치워요. 걘 노후보 찍었어. 며느리도. 대구에서 나온 노표는 다 제들 장난이라니깐". 아버지가 시큰둥 말한다.

"서울만 교통 정비할 게 아니라, 미군 주둔하고 있는 포천·의정부도 도로 정비를 해야지. 차도와 인도가 구분되어 있었다면 여중생 죽는 사고도 안 났을 거야. 길은 좁지, 덩치 큰 전차는 오지, 전차 피해 내려서려니 비탈이라, 설마 저 느림뱅이 전차가 사람 치겠나 하고 방심하다 사고를 당한 거야". 대령 출신이 엉뚱한 논리를 전개한다.

"애가 지방대학 사학과 출신이야. 수삼 년 차 취직이 하도 안 돼 환경운동 단첸가 거기서 뛰다 며늘애를 만났지. 서른 넘은 놈이 아직도 제 밥벌이를 못해. 며늘애가 이제야 교사선발 시험에 합격됐으니 곧 지방 학교 어디에 발령이 나겠지. 그럼 쟤는 집에서 애나 볼 테고……". 아버지가 소주 한 잔을 비우고 처연하게 말한다.

"아버지, 들어가세요. 뉴욕에서 엄마 전화 왔는데 아버지 약주 때문에 걱정이 많으십디다.

아버지 제자 있잖아요? 광욱이도 집에 왔어요. 인사드리겠다며……".

"나도 이제 살만큼 살았어. 술 안 먹고 어떻게 살아? 나라 돌아가는 꼬락서니하고는. 네 고모 독일 간호사로 가서 거기 주저앉았지만, 우리 세대는 중동 건설 현장으로, 독일 광부며 간호사로 그렇게 뛰며 오늘날 이 정도 먹고살 만큼 나라를 세웠어. 너희 세대가 뭘 했어? 아니,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컴퓨터만 들여다보면 돈이 돼? 우리 양주 죽고 나면 아파트나 차지하겠지".

술잔에다 자작으로 술을 치는 아버지 말에 나는 대답할 말이 없다.

취직 자리를 구할 때까지 애를 낳지 말기로 하여 결혼 3년 차에 성호를 낳았으나 어쨌든 아직도 독립을 못한 채 부모님 밑에서 기식을 하고 있는 셈이다.

"육니오 때 형님은 몇 살이었습니까? 내가 열한 살 땐데, 엄동에 대구까지 피난 내려오며 죽을 고비 숱하게 넘겼습니다.

그 고생이 있었기에 오늘까지 근검절약하며 이 악물고 살아왔죠. 그러나 이렇게 나이 먹으니, 나라가 우리 세대한테 해준 게 뭡니까?" 캡 쓴 아저씨가 분통을 터뜨린다.

"아버지, 가세요. 집에도 술 있으니 친구분들 모시고 집에 서 드세요". 노친네들의 푸념이 길어질 것 같아 나는 아버지 겨드랑에 손을 넣고 일으켜 세운다.

"좋지. 가서 한 잔 더 하자고. 아직 초저녁 아냐". 대령 출신이 호기 있게 일어서며, 주모에게 술값이 얼마냐고 묻는다.

우리 아파트에서 자고 간 날, 내가 듣기로 대령 출신은 처와 사별한 후 딸네집에 몸을 기탁해 연금으로 기원에서 소일한다 했다.

그러니 집발이 붙지 않아 24시간 문을 여는 목욕탕에서도 곧잘 잠을 잔다는 것이다.

"순대국 한 그릇에 소주 네 병이라, 만이천 원 되겠네요". 주모가 말한다.

바깥으로 나오니 매서운 바람이 기승을 떤다.

아버지는 내 팔에 몸을 맡긴 채 축 처진 걸음을 겨우 옮긴다.

아버지를 모시러 왔다 혹까지 붙여서 가는 건 좋은데 친구들과 또 세대 논쟁이나 붙지 않을까 나는 걱정이 된다.

마침 캡쓴 아저씨가, "형님들, 내일 기원에서 보세요" 하며 걸음을 돌린다.

"김 대령, 구, 군가 하나 불, 불러봐요". 아버지가 말한다.

갑자기 취기가 더했는지 발음조차 분명하지 않다.

"군가는 무슨 군가. 이 시간에도 휴전선에 초병은 떨고 섰겠지. 이젠 우린 누구를 적으로 해서 싸워야 해? 물론 싸울 필요가 없는 평화가 한반도에 정착되면 좋겠지만……, 박형, 어디 이상과 현실이 맞아떨어진 적이 있었소? 나이 드니 우리가 너무 겁쟁이, 엄살쟁이가 됐나요?" 대령 출신이 허탈하게 묻는다.

"어이쿠!"

아버지가 앞으로 꼬꾸라진다.

허튼 걸음이라 발이 접질린 모양이다.

아무래도 술을 더 하기는 힘들겠다며 아파트 앞에서 대령 출신도 돌아선다.

아버지를 부축해 아파트 우리 호실로 돌아오니 친구들 중 다섯 명은 잽싸게 돌아갔고 셋이 남아 술추렴이다.

엠네스티지부에 근무하는 노처녀로 처의 친구인 허양이 담배를 피우다 얼른 재털이에 끈다.

아버지는 어느 사이 인사불성이라 나는 부모님 방으로 아버지를 모신다.

처가 이부자리를 펴자 아버지는 옷을 입은 채 요 위에 새우처럼 몸을 옹송그려 눕는다.

"잘 해 보라고……. 거긴 구십 프로가 넘고, 여긴 칠십오 프로라……. 좋은 나라 만들어보라구……".

선거 끝난 지가 언젠데 아버지는 잠결에도 헛소리를 한다.

아버지 세대와 나의 세대, 그 갈등의 골은 살아온 세월이 다른 만큼 쉬 치유되지 않으리란 예감이 든다.

어쩔 수 없다.

불편한 동거를 인정하며 내일을 바라보는 수밖에. 꿈이나 희망을 품으면 실현이 전혀 불가능하지도 않다.

김원일

▲1942년 경남 김해시 출생. ▲1966년 문단 데뷔. ▲장편소설 '노을' '겨울 골짜기' '마당 깊은 집' '불의 제전' 등 작품 다수. ▲동인문학상.이산문학상.황순원문학상 등 수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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