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업그레이드-이것만은 버리고 가자 (12)소비.향락문화

입력 2003-01-25 15:10:01

대구 수성경찰서 한 형사는 얼마전 기소중지자 신고를 받고 수성구 두산동 속칭 '여관 골목'으로 출동했다 깜짝 놀랐다고 했다.

오후 1시쯤이었는데도 여관의 빈방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는 것. "대낮이라 투숙객이 적어 용의자를 쉽게 찾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을 완전히 뒤집었다"고 했다.

형사가 찾아간 곳은 48개의 여관이 몰려 있는 '여관 골목'. 1990년대 초부터 들어서기 시작, 94, 95년을 거치면서 지금의 여관촌을 이뤘다.

이곳에 여관들이 집중적으로 들어선 이유에 대해 수성구청은 "주변에 룸살롱, 가요주점, 나이트클럽 등 유흥업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유흥업소와 여관들이 밀집하면서 이 일대는 대구지역 최대의 유흥 지구가 됐다.

수성구청에 따르면 황금네거리에서 두산오거리 사이 동대구로변 인근에 위치한 유흥주점과 여관은 100여개. 수성구 전체 유흥주점과 여관 숫자의 30%에 이르는 규모이다.

달서구 죽전네거리에서 본리네거리 사이에도 화려한 외관과 최신시설을 갖춘 대형 유흥업소와 여관들이 즐비하다.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궁전과 성처럼 화려하고 장대한 여관의 건물들은 보는 이들의 입을 쩍 벌리게 한다.

서울에서 일 때문에 대구에 왔다는 박정대(30)씨는 "죽전.본리네거리 부근에 좋은 여관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왔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보이는 건 온통 여관, 주점뿐이어서 대구에도 유흥특구가 있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겉모양뿐 아니라 먹고 즐기는 모양새도 별나다.

소비.향락 문화가 전국 최고 수준이라는 얘기까지 들린다.

대구시의 한 공무원은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전국 대도시 노래방들의 퇴폐.향락 정도를 조사했는데 대구가 최고로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노래방 퇴폐 영업이 기승을 부려 수성구 등 일부 구청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신고보상금제'를 시행, 퇴폐.향락 노래방과의 전쟁을 선포할 정도이다.

업주들도 자정 노력을 결의했다.

그러면서도 업주들은 "노래방 문화를 이렇게 만든 것은 업주들의 책임도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술과 접대부가 없는 노래방을 외면하는 시민들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은 대구지역의 향락 문화 발달은 제조.첨단 산업보다 서비스 산업이 주력을 이루고 있는 기형화된 지역의 산업 구조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지역의 폐쇄.보수적 성향도 과소비.향락을 일으키는 주요한 이유로 꼽히고 있다.

집단적 보수성은 개인의 속마음을 숨기게 하고 개성의 표현을 억누르게 한다.

억압은 반작용을 일으키기 마련. 사람들의 정상적인 표현의 출구가 막히면서 향락.과소비.문란한 성문화 등 왜곡된 방식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폐쇄.보수성은 공개적.직접적인 표현을 통한 해소 대신 밀폐.제한된 공간에서 상대적 약자에게 분을 풀려는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고 했다.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에게 짓궂은 행동을 강요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대구가톨릭대 사회학과 이정옥 교수는 "직장 상사 등 인간 관계에서 받은 거북한 감정을 대화 등으로 해소하지 않고 술 등을 통해 비정상적으로 폭발시켜 버리는 경우가 많다"며 "이러한 불만족스러움이 향락.퇴폐 문화의 발달로 이어진다"고 했다.

이 교수는 보수성이 과소비 문화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권위적.가부장적인 문화로 인해 억눌려 있던 감정이 과소비로 왜곡돼 표출된다는 것. 동등한 사회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때문에 표현 욕구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한국 여성이 외부 치장에 유난히 신경을 쓰는 것도, 전세계에서 고가의 옷.화장품 등의 구매 비용이 가장 많은 국가로 분류된 것도 이때문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타지역보다 계층간의 소득 격차가 큰 대구의 경우 특히 심하다고 했다.

이는 고급 승용차, 비싼 술, 고가품 등 과소비 경쟁으로 이어지고 우월.열등감으로 표출돼 차별주의.반인권 문제까지 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대구 경실련 조광현 사무처장은 "대구의 경우 타지역보다 소비 성향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위 '있는 사람들'의 소비 형태만 겉으로 보여서이지 시민 모두가 과소비를 하는 것은 아니다"며 "일부 시민들의 과소비 경향이 지역민간의 화합을 저해, 지역 발전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대구가 소비와 향락의 도시란 오명을 받는데 좀 억울한 면도 있다.

숫자 놀음에 불과하지만 실제 대구시의 유흥업소.여관.음식점 등은 인구비례로 봐도 타도시에 비해 그리 많지 않다.

유흥.단란 주점의 경우 2000년 말 기준 대구가 1천338개로 서울 7천794개, 부산 4천492개보다 크게 적은 것은 물론 대구와 인구가 비슷한 인천의 1천967개보다도 적다.

대구보다 인구가 100만명 이상 적은 대전 1천22개, 광주 992개, 울산 1천469개와 비슷한 수치.

또 여관, 러브호텔 등 숙박업소 경우도 대구가 1천347개로 서울 4천535개, 부산 2천698개, 인천 1천580개보다 적다.

충남 출신의 대구 중부경찰서 이우복 방범과장은 "대구가 배타적이고 소비적 도시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곳에 와 생활해보니 타도시와 크게 다를바 없었다"며 "하지만 '통이 크다'고 할까, 뭐든지 '크게', '많이' 하려는 경향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소비.향락도시라는 오명을 씻을 때가 됐다.

통이 큰 것은 좋지만 향락과 과소비는 옳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 접대문화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대구시 범어동 한 주점 업주는 "IMF때는 물론 3년전까지만 해도 접대문화가 성행해 영업이 잘됐지만 지금은 술접대 자리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여관들도 소위 '대실'족들이 갈수록 줄고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소비.향락을 통해 불만족스런 욕구가 해소되는 것 같아도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며 "적극적인 의사 표현이나 창작 및 취미 활동 등을 통해 소비.향락에서 느낄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또 "사회 지도층부터 과소비.접대문화 등을 근절하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호준기자 hoper@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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