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년 시즌을 끝으로 삼성의 사령탑에서 물러난 김영덕 감독은 논란이 끊이지 않았 던 명장이다. 84년부터 86년 시즌까지 3년간 팀을 맡아 역대 삼성 사령탑 중에서 장수한 편에 속했던 그는 84년 한국시리즈 상대 고르기로 비난을 받았는가 하면 잔수에 밝은 그의 지휘 스타일로 인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길 줄 아는 감독이었다. 82년 OB 감독에서 시작, 93년 빙그레 감독 을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그는 페넌트레이스에서 712승482패를 기록, 5 할9푼6리의 승률로 초창기 두 시즌에서 삼성을 이끌었던 서영무 감독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최고 승률을 기록한 감독으로 남아있다.
한국시리즈에서 10번의 우승을 일궈냈던 김응룡 감독도 페넌트레이스 승률은 5할5푼9리(1천232승973패·2001년 시즌)로 그에 못 미쳤다. 이렇듯 최고의 승률을 기록한 김영덕 감독은 큰 경기에 약하다는 징크스를 갖고 있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편이어서 이기고 있을 때는 느긋하지만 질 때는 안절 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시리즈처럼 큰 경기에 나설 때는 초조감 이 지나쳐서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승부에 대한 중압감에 시달 렸다. 그의 약한 신경이 승부에 영향을 미쳐서일까, 그는 7차례 한국시리즈에 올 라 82년 OB감독 시절 우승을 차지한 것 말고는 더 이상 우승(85년 통합우승 제외) 의 기쁨을 맛보지 못했다.
그는 한국시리즈에서 12승25패, 3할2푼4리의 승률을 올 리는 데 그쳤다. 특히 그의 야망을 좌절시켰던 김응룡 감독에게는 86년 삼성, 88 년 89년 91년 빙그레 감독 시절 모두 패했다. 페넌트레이스 승률에서 김영덕 감독 에게 뒤진 김응룡 감독은 한국시리즈에서 42승15패, 7할3푼6리의 높은 승률을 올 렸다.
재일교포 출신인 김영덕 감독은 일본 프로야구 낭카이 호크스에서 활약하다 64년 모국에 돌아와 해운공사, 한일은행에서 명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은퇴한 뒤 장충 고 천안북일고 감독으로 활약했으며 특히 당시 신생팀 천안북일고를 급속히 야구 명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프로에 와서도 그의 능력은 빛을 발했다. 프로야구 원 년 OB를 우승으로 이끌었고 85년 삼성의 통합우승을 일궈냈다. 88년 빙그레 사령 탑으로 부임한 뒤에는 신생팀 빙그레를 네 차례나 한국시리즈에 진출시키는 등 명 장의 면모를 보였다.
일본식 야구로 무장한 그는 선수를 보는 눈이 뛰어나고 번트작전을 자주 구사, 비 난을 사기도 했지만 경기의 흐름을 읽는 수가 정교했다. 선수들에게 치열한 적자 생존식 용병술을 구사, 선수들의 자생력을 길렀으며 이 과정에서 스타를 길러낸 반면 일부 선수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삼성 감독 시절 1세대 스타인 배대웅과 천보성 대신 미완의 대기 김성래를 발굴, 그를 꾸준히 경기에 기용함으로써 '홈런 타자'로 성장시켰고 빙그레에서는 이강돈, 이정훈의 자질을 꽃피웠다. 또 연습생 출신인 한용덕과 장종훈을 발굴, 그들을 특급 투수와 한 시대를 풍미한 슬러거로 키워냈다.
김지석기자 jise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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