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마을-경주 양동마을

입력 2003-01-16 19:4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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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전체가 주요 민속자료 189호인 양동(良洞)은 민속 체험 관람객들로 연중 북적인다.

일요일인 지난 12일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마을을 찾은 30대 후반의 한 부부는 "조상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의미있는 여행이 됐다"며 감탄했다.

양동은 그 자체에 마을이란 뜻이 들어있음에도 통상 '마을'자가 뒤에 붙어 '양동마을'로 불린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지리적 위치로는 경주시에서 북으로 21㎞지점, 포항시 경계에서 2㎞ 정도 떨어져 있다.

북서쪽으로는 해발 163m의 설창산, 동남쪽으로는 해발 108m의 성주봉이 접한다.

이대식(77) 양동마을 보존회장은 "마을 뒷산이 물자(勿字)형의 산곡(山谷)으로서 경주쪽에서 형산강물이 마을로 흘러들어 오는데 흘러나가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마을의 끊임없는 부(富)의 원천"이라면서 "천석꾼이 여섯집이나 나올 정도로 명당"이라고 설명한다.

양동마을은 유가(儒家)의 법도와 선비기풍으로 500 여년을 다져오면서 국보인 통감속편(痛鑑續編), 여강 이씨 종가 무첨당, 월성 손씨 종가 서백당 등 32점의 문화재를 간직한 보기드문 반촌(班村)으로 전통문화와 한국적 정취가 그 어느곳보다 물씬 살아 숨쉬는 곳.

주민 손병익(71)씨는 "일제 강점기에도 음력설만을 우리설이라며 지켜왔고, 그 엄했던 단발령에도 상투를 고집해온 지조있는 선비의 고장"이라고 자랑스러워 했다.

마을 초입은 길들이 마구 파헤쳐져 있어 어수선한 분위기다.

좁은 진입로를 넓히는 공사 때문이라고 한다.

양동마을을 찾는 관람객들은 매년 2만명씩 증가추세를 보인다.

그러나 주차장과 급수대.공중화장실 등 편의시설 부족현상은 여전히 심각한 수준.

마을에 들어서면 북촌 물봉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보물 제442호 관가정(觀稼亭)이 눈에 띈다.

청백리이자 조선 성종(1469-1494)조에서 중종(1506-1544)조에 걸친 명신 우재 손중돈 선생이 손소공으로부터 분가하여 살던 집이다.

격식을 갖추어 간결하게 지은 건물은 전통적인 ㅁ자형의 멋스러운 건축이다.

한 눈에 들어오는 형산강과 경주를 품어 안는 경관이 일품.

보물 제412호 여강 이씨 향단파 종택인 51칸의 향단(香壇)은 회재 이언적(晦齎 李彦迪.1491-1553)선생이 1543년경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중종임금이 회재의 모친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해서 지어 준 집이다.

회재선생의 아우 이언괄(李彦适)공이 벼슬을 마다하고 평생 노모를 모시고 집안을 꾸려가 형의 출사(出仕)를 도왔는데 그의 손자의 호가 바로 향단이다.

양동의 전통문화 중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학문과 교육의 전통으로서 오늘날까지 수많은 인물을 배출해 왔다는 점이다.

조선중기 부터 조선사회와 중앙 정계를 지배한 사림(士林)들 중에서 앞선 시기인 세조 5년(1459년) 이 마을의 손소(孫昭)공이 문과를 급제하고 중앙 정치무대에 진출하여 이시애(李施愛)난을 진압할때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

이어 그의 둘째 아들인 손중돈(孫仲暾)선생이 성종 20년(1489년) 문과에 급제해 이조판서.우참판 등 40여년 동안 요직을 두루 거치고 청백리에 올랐다.

대 유학자이자 경세가인 이언적 선생은 성리학의 이기철학(理氣哲學)을 이황(李滉)에 앞서 최초로 이론적 체계를 세워 조선조 성리학의 기초를 다졌다.

그가 지은 '태극논변(太極論辯)'은 조선중엽 이후 성리학의 지침이 되었으며, 중종(中宗).인종(仁宗).명종(明宗)때 명신으로 활약하면서 조선사회의 정치와 철학사상의 기초를 다짐으로써 사후 종묘배향(宗廟配享) 및 문묘(文廟)에 종사되어 역대 임금.공자와 함께 위패가 모셔졌고 전국의 향교와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월성 손씨의 안락정(安樂亭)과 여강 이씨의 강학당(講學堂)을 보면 당시의 뜨거운 교육열의를 짐작할 수 있다.

손국익(68.전 양동마을보존회장)씨는 "지금도 경제적인 능력에 비해 주민들의 교육열의가 매우 높아 대학원 진학을 예사로 생각할 정도"라며 "조상들의 학구열이 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마을에는 신라시대부터 주민생활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오(吳)씨, 장(將)씨, 유(柳)씨가 세거했다는 구전이 있으나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다.

월성 손씨 입향조 손소(孫昭)의 입향 이래 손씨 문중 소장의 동안(洞案), 향약안(鄕約案), 호적초안(戶籍草案), 종길문(宗吉文) 등을 보면 살펴보면 인구 및 가구의 변화추세를 살필 수 있다.

성씨별 분포로는 모두 151 가구중 여강 이씨 80가구, 월성 손씨 16가구, 타성 55가구를 차지하여 타성이 증가하고 손씨는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두원(53) 이장은 "젊은층은 직장따라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만 집을 지키거나 빈집이 늘어나고 있다"면서 "포항 등지에서 출퇴근 하는 직장인들이 가끔 빈 집을 찾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안락천을 끼고 마을 서쪽 10여리에 펼쳐진 넓은 안강평야는 이 마을을 지탱하는 경제력의 바탕이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소작인들이 안강들에 별도로 형성된 소작인 마을인 '들마을'에 살면서 경작하였으나 1991년 그레디스 태풍때 침수되어 주민들이 인근마을로 이주하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500 여년동안 양반마을로서 부를 누려온 풍요로운 양동마을은 음식문화도 풍부하고 독특했다.

과거에는 안강평야의 다양한 농산물과 인접 동해안의 풍부한 해산물을 재료로 만든 음식들을 즐겼고 손님을 대접할 때는 격식을 갖춘 7첩반상을 차렸다고 한다.

복계탕, 문어쳇국, 육포, 독특한 칼국수, 장아찌 종류 등 다양했으며 손님에 대한 음식접대는 유가의 엄격한 기풍보다는 정성어린 환대와 인정이 넘친다.

마을에서 예로부터 전해오는 청주는 맛이 순하고 취하도록 마셔도 두어시간 지나면 머리가 깨끗해지는게 특징이다.

박준현기자 jhpar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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