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오후

입력 2003-01-15 21:49:02

한때 너를 위해

또 너를 위해

너희들을 위해

씻고 닦고 문지르던 몸

이제 거울처럼 단단하게 늙어가는구나

투명하게 두꺼워져

세탁하지 않아도 제힘으로 빛나는 추억에 밀려

떨어져 앉은 쭈그렁 가슴아-

살떨리게 화장하던 열망은 어디가고

까칠한 껍질만 벗겨지는구나

헤프게 기억을 빗질하는 저녁

삶아 먹어도 좋을 질긴 시간이여

- 최영미, '목욕'

갓 서른을 넘었을 때 쓴 시가 불혹의 나이를 넘은 여류시인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살떨리게 화장하던 젊은 육체의 시간은 가고 오직 뒤집혀진 추억의 서랍만이 빛나고 있다.

동시에 그 추억이란 칼로도 끊을 수 없는 질기디 질긴 매머드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상처를 누더기 하나 걸치지 않는 투명한 몸부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권기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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