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업그레이드 이것만은 버리고 가자-(6)패거리 문화

입력 2003-01-13 19:15:47

"애들이 뭘 안다고.... 그 아이 참 많이 컸구나".

지난해 50대 초반 지역 기업인이 모경제단체장에 출마했을 때 일부 원로들이 내뱉은 말이다.

섬유단체에서 이사를 맡고 있는 40대 중반 모업체 사장은 "이사회에서 말 한마디 꺼내기가 힘들었다"며 "새로운 제안을 하다 '내가 자네 아버지 연배인데 버릇없구나'고 핀잔을 듣기 일쑤다"고 말했다.

최희도(59) 대영직물 사장은 "대다수 30대 전후인 홍콩, 중국 등 바이어들이 계약이나 상담때 대화를 꺼린다"며 "또 노트북을 옆에 끼고 영어를 능란하게 구사하는 젊은 바이어들을 상대해 영업 자체가 어렵다"고 말했다.

최 사장은 결국 외국어를 잘하는 젊은 직원을 뽑아 최근 영업을 맡겼다.

지역 경제계에 '세풍'(세대교체 바람)이 절실하다.

단순히 젊은 세대로의 교체가 아니라 낡은 관행(틀), 패거리 문화, 고루한 의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게 지역 경제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정인 대구경북개발연구원 지역개발실장은 "기관·단체장을 대물림하거나 공채없이 연구소 인력을 뽑고, 낡은 경영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경제계가 버려야 할 구태"라고 말했다.

'단체장 나눠먹기'는 경제계의 대표적인 고질적 관행이다.

과거 대구상공회의소 회장 선거가 그랬고, 지난해 대구경북섬유산업협회장이나 대구경북견직물조합 이사장 선거에서도 불거졌던 문제다.

지난해 한국패션센터가 비리로 심한 몸살을 앓았던 것도 잘못된 인사관행이 낳은 결과라는게 업계의 지배적 시각이다.

김상훈 대구시 섬유진흥과장은 "일부 경제단체가 관련 업무 중심으로 운영되기 보다 단체장의 특성에 따라 좌우되는 경향이 있다"며 "이런 문제의 시발점은 단체장 선출방식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상당수 지역 경제단체·기관장 선거는 공개 경선보다 사전 정지작업이 우선하고 있다.

특히 '입김이 센' 원로나 다른 기관장의 의견, '패거리'를 동원한 조직력이 총회보다 훨씬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다수의 의견을 모을 수 있는 총회가 유명무실해지는 대신 총회 참석자들이 사전 조율된 후보자에 대해 거수기 역할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누가 (단체장을) 해야 나한테, 우리 편에 유리하다'는 식의 편가르기와 '저번에 누가 했으니 이번엔 누가해야 순서다'는 식의 패거리주의도 업계에 널리 퍼진 낡은 문화다.

지난해 대구에서 경제관련 기관장을 역임하고 서울로 떠난 한 인사는 "꽉 짜여진 '패거리 문화'에 순응하거나 편입되지 않고는 발붙이기 힘들었다"며 "창의성이나 합리성보다는 '어느 편이냐'가 중요했다"고 말했다.

기관·단체장을 편가르기식으로 뽑다보면 인물 됨됨이나 업계를 위한 비전, 단체 활성화 방안 등은 뒷전으로 밀리기 십상이다.

이렇게 선출된 기관·단체장은 이사, 감사를 비롯한 임·직원을 '내 사람', '우리 편'만을 기용하기 마련이다.

결국 이런 조직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나 발전적 제안, 조직에 대한 문제제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것.

'공개채용 없는 연구소 문화'도 구태에 다름 아니다.

지역업계 한 관계자는 "원장, 소장 등 연구소를 끌고 갈 실무자들이 해당 단체장이나 자신을 앉혀준 기관·부처의 눈치를 살핀다면 연구소가 제대로 운용되겠느냐"고 일침을 놓았다.

문종상 전국과학기술노조 한국섬유개발연구원 지부장은 "현행 연구소 임원의 전형방식으로는 전문경영인보다 특정인이나 인맥, 정부의 낙하산 인사로 이어질 소지가 크다"고 말했다.

사장이 경영정보나 인사권을 틀어쥐고 과거의 영업 및 생산방식을 고집하는 경제계 풍토, 전문경영인을 외면하는 문화도 글로벌 경영시대에 걸맞지 않는 낡은 관행으로 꼽힌다.

박호생 (주)성안 부사장은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직원들과 더불어 회사의 진로를 고민할 때 사업추진 과정에서 직원이나 노조의 동의도 쉽게 끌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박 부사장은 또 "최근 30~40대 젊은 직원들을 대폭 전진 배치해 영업활동 방식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승진 영남대 교수는 "세계 교역환경이 급변하고 있다"며 "최근 대만에서 열린 경제관련 국제학회에서 젊은 40대 연구소장들과 단체장들의 국제적 경영마인드에 놀랐다"고 말했다.

박노화 대구경북견직물조합 이사장은 "지역 경영자들이 연구개발이나 마케팅 등을 고민하지 않고 '만들면 팔린다'는 식의 의식을 이제 버려야 한다"며 "특히 외국 젊은 바이어들의 순발력있는 영업마인드에 대응할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당연시됐던 낡은 관행과 틀을 과감히 바꾸면서 급변하는 국제 경영환경에 발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지역 경제계가 시급히 풀어야 할 숙제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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