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따라 세월따라

입력 2003-01-13 09:45:55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는 잃어버린 꿈이 있다.

가버린 세월의 강물 속에는 가슴 저미는 그리움이 일렁댄다.

사진작가들이 소장한 또는 옛 앨범안에 잠자고 있던 사진 속으로 추억여행을 떠난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흑백의 풍경 속에는 겉모습만 화려한 오늘을 비추는 여유가 담겨 있다….

동지 무렵의 짧은 겨울해가 그림자처럼 길게 서산에 기울었다.

동구밖에서 벌어진 아이들의 구슬치기는 해 저무는줄 모른다.

오른손에 구슬을 꼬나쥐고 땅바닥에 바짝 붙은 채 상대편 구슬을 겨누고 있는 아이나, 행여 자신의 구슬이 따먹힐까봐 자세를 반쯤 낮춘 채 반짝이는 구슬을 내려다 보고 있는 아이의 표정은 차라리 비장하다.

그림자가 절반을 점령한 골목길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돈다.

구슬치기에 열중하고 있는 당사자보다는 다소 여유가 있어보이기는 하지만 구경꾼의 표정도 심각하다.

검은 교복차림에 흰 명찰을 단 오빠 등에 엎힌 어린 누이도 구슬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썰매타다 젖은 발로 돌아오던 친구도 다리가 시린 것조차 잊었다.

오른쪽 무릎에 '빵꾸'난 바지를 입은 동무도 구슬치기 판에 넋을 빼았겼다.

이번 한판 겨누기에 승패가 달렸다.

마지막 남은 이것을 따먹혀버리면 새 구슬을 얻기 위해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열흘 남짓은 눈물콧물을 찍어내야 한다.

너나없이 검정 고무신을 신고 검은 물을 들인 교복차림으로 책보자기를 메고 학교에 다니던 그시절은 용돈이라는 게 없었다.

그러니 몇개의 구슬은 아이들의 귀중한 재산이었다.

구슬을 한 두개라도 따는 날은 온 세상이 내것이었다.

개수가 늘어난 구슬을 세어보고 또 세어보고…. 밤이면 뒤뜰 추녀밑에 파묻어두고 '쉬'하러 나올 때마다 확인을 해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중천에 걸린 조각달과 이따금씩 귀뺨을 스치는 밤바람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재산을 불려가는 그 뿌듯함이란…. 그러나 구슬을 따먹힌 날은 세상이 온통 회색이었다.

잠자리에 누워도 외풍에 떠는 문풍지 소리만 자꾸 요란했다.

천장에는 잃어버린 구슬이 이리저리 굴러다녀 눈망울이 속내처럼 까칠까칠했다.

내일부터는 멀뚱멀뚱 구경만 해야하는 신세로 곱다시 전락해버렸으니 말이다.

땟국이 눌러붙은 앙증맞은 손아귀에 몇개씩의 구슬을 보물처럼 움켜쥐고 겨울 한나절을 바투잡던 그 동무들 지금은 어디에….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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