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초기 이민사는 남자들의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억척같은 삶을 살았던 여성들의 역사입니다.
여성은 가정을 경제적으로 안정시키고 하와이를 독립운동 기지로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하와이 이민사를 연구하는 이덕희(62·여) 미주이민 100주년기념사업회 하와이위원회 부회장은 이같이 잘라 말했다.
그는 "한인들이 하와이 주류사회에 진입하며 성공의 꽃을 피운 배경에 여성들의 적극적인 생활과 불타는 애국심, 교육열기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1903년 시작된 한국인의 하와이 사탕수수 밭 이민이 3년만에 7천여명으로 끝났을 때 500여명의 한인 여성들이 있었다.
남편을 따라 식구들과 함께 이주한 부인들이다.
그들이 언어와 풍습, 제도가 다른 이국사회에서 경제사정이 어려운 가운데 다른 여러 민족과 섞여 생활하는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의 대부분 여성들은 자녀양육은 물론 남정네들과 함께 사탕수수 밭에서 고된 일을 하거나 혼자 사는 남자들의 빨래와 식사 등 부업으로 뼈빠지게 일하며 바쁘게 지냈다.
이들은 한국의 '맞벌이문화'의 효시가 됐다는 평가도 듣고 있다.
1905년부터 첫 한인 감리교회인 에바농장교회 등 사탕수수 농장 곳곳에 한인교회가 세워진 데다 1910년대 교회사진에 여자들이 많이 보여 상당수 부인들이 교회에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하와이 한인 여성들은 조국의 여성들에 비해 깨어 있었다.
이들은 집과 교회생활 이외에 여성단체를 만들어 조직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1907년 신명부인회가 결성돼 정치와 사회활동을 벌였다.
1909년 4월 설립된 부인교육회는 여성개화뿐 아니라 구국운동 차원의 여성교육에도 힘썼다.
1913년 적어도 4개 단체가 있었고, 각 섬마다 지부를 뒀다.
1913년 모든 단체는 대한부인회로 통합돼 일제에 빼앗긴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심에 불타 자녀에 대한 철저한 교육열로 이어졌고 기독교 전도에도 힘을 쏟았다.
이와 달리 초기 이민 남성의 84%는 20대거나 조국에 부인과 가족을 남겨둔 처지여서 결혼문제가 이민사회의 현안으로 떠올랐다.
1910년부터 24년까지 부산 등 전국에서 신문광고를 보고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진속의 신천지 예비신랑과 결혼하려는 여성 500여명과 지아비와 재결합을 위한 부인 400여명 등 '사진신부' 951명이 태평양을 건넘으로써 하와이 한인 여성사회 규모는 더 커지고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2001년 10월 마지막 사진신부로 이민사의 상징적 인물로 존경받았던 유분조 할머니가 101세로 세상을 떠나 이민 1세대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의 외동딸 앨리스 김(74)씨는 "부모가 한평생 정말 힘들게 고생한 덕택에 우리 5남매는 편하고 순탄하게 성장했다.
초기 이민자들의 삶은 다 그랬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1900년 경남 밀양의 한약방 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19세에 부산에서 배를 타고 사탕수수밭 노동자인 23세 연상의 남편에게 시집와 결핵으로 몸져 누운 남편의 병수발에다 일당 1달러 25센트를 받고 인부 수십명의 빨래와 삯바느질, 남의 집 청소 등 온갖 고생을 하면서 자식들을 모두 대학에 보냈다"며 모친의 강인한 생활력을 자랑했다.
"10년 넘게 떨어져 지낸 가족의 합류로 한인사회는 안정돼 갔다.
하지만 평균 15세나 많은 사람과 결혼한 사진신부 상당수는 자식을 낳은 지 얼마 안돼 남편이 죽는 바람에 가족생계를 책임진 삶이 고달팠으며 재혼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이덕희 부회장은 설명했다.
10세 때 하와이에 정착, 평생 한인을 돕고 살아 '소셜워커'란 별명을 얻은 마가렛 림(정태임·101) 할머니는 "어머니는 32세인 1912년 낙동강 옆 부산 주례에서 살다 13세 많은 한인과 재혼하려고 사진신부가 됐다"며 "나는 부모가 일하는 와이알루아 사탕수수농장에서 집안 일을 돕다가 이승만 박사가 교장으로 있던 여자성경학원에서 4년간 남의 집 일을 하며 공부한 뒤 18세에 17세 연상의 한국 남자와 결혼, 세탁업과 외판원을 하면서 자식들을 의사, 교사 등으로 키웠다"고 말했다.
질곡의 삶을 살았던 여성들은 1919년 3월15일 대한부인회를 적십자사격인 대한부인구제회로 개칭, 독립운동 참여를 전격 선포한다.
고국에서 3·1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부상한 사람들의 구제와 중국 만주 등지의 독립전쟁을 지원키 위해 기금모집을 활발히 전개했다.
1919년 5월 조직된 한인소녀회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의 독립을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
이밖에 1935년 결성된 부인호상회, 해방 전에 생긴 애국부인회, 한국전쟁 이후의 대한구제위원회 등이 있었고 일찌감치 각 교회와 교파별 부인조직도 존재해 여성들의 사회, 교육, 교회활동이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이 부회장은 "여성들은 남편의 수입에서 회비를 조금씩 뗀 소극적 여성이 아니라, 생계나 자녀교육을 책임지면서도 돈을 벌어 해방 전까지 무려 300만달러의 독립자금을 내놓은 적극적인 부인"이라며 "여성들이 좌절하지 않고 흘린 땀과 눈물이 현재 4, 5세대까지 이어진 한인사회 발전에 주춧돌이 됐다"고 진단했다.
'아메리카로 가는 길'의 저자 웨인 패터슨도 "성실함으로 낯선 환경에 빠르게 적응한 사진신부들의 뜨거운 애국심과 교육열은 이민사회의 안정적 정착과 교회 및 한인단체의 발전, 독립운동, 후손들의 성공에 밑거름이 됐다"고 서술했다.
하와이 호놀룰루=강병균기자 kbg@busanilbo.com
사진 강선배기자 ksun@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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