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책과 추억

입력 2003-01-10 18:35:59

겨울 방학이 오면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책을 읽던 시절이 있었다.

문풍지가 울고 먼 데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긴 겨울밤의 안온함을 만끽하며 우리는 책을 읽었다.

아버지는 왕비열전과 같은 전집류를 머리맡에 쌓아두고 읽으셨던 것 같다.

군고구마나 떡 따위를 시원한 동치미와 함께 내오시며 흡족해 하던 어머니의 미소도 잊을 수 없다.

괘종시계가 방안의 공기를 흩어 놓거나 사랑방에서 들리는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정적을 깨던 겨울밤.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다보면 어느 새 겨울 방학은 막바지에 이르곤 했다.

그 때 읽은 책들은 내가 성장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엄한 가정 환경과 교육, 타고난 소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솟아 오르는 호기심과 살아 움직이는 감성들은 책 속에서 빛을 발했다.

아련하게 남아있는 책에 대한 추억들은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가끔씩 시간이 나면 무작정 도서관을 찾는다.

부질없는 일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나를 죽비처럼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따뜻하게 위로하고 용기를 주기도 한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다 돌아올 때의 즐거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책에 탐닉할 수 있는 여유로움에 감사하며 내면은 충만감으로 부풀어 오른다.

하지만 갈등이나 선택의 여지도 없이 주문형 교육에 맞춰 성장하는 요즘 아이들을 볼 때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들은 훨씬 현실적이다.

여유와 이상을 꿈꾸며 가슴으로 만나는 책읽기는 어쩌면 사치일지 모른다.

국어공부 하듯 이야기의 배경과 인물 분석, 그리고 주제를 찾아 논리적인 글을 쓰는 일이 더 시급하다.

그들에게 독서는 명문대를 향해 거쳐야 할 또 다른 관문이다.

획일화 된 독서법이 아이들의 꿈을 꺾지는 않는가. 빛 바랜 종이에 흑백그림이 간간이 나오던 책을 읽었지만 부단히 꿈을 꾸며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던 시절이 그립다.

모두가 교과서처럼 규격화 된 삶을 추구하고 있다.

다채로움이 빚어내는 즐거움과 폭넓은 사고의 만남, 참고서나 재미를 더해 주는 별책부록 같은 삶도 좋지 않을까.

조낭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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