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칼럼-새해에 띄운다

입력 2003-01-07 17:15:19

새롭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을 뜻한다.

변한다는 것은 반드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도 있다.

때로 좋지 않게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 풍속이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아닐까?

나와 같은 세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요즘의 설 풍속은 너무도 쓸쓸하다.

설이란 말을 쓰기가 무색하다.

우선 설빔이란 말은 죽은 말이 돼가고 있다.

그런 말을 쓰는 층이 거의 없어져가고 있다는 것도 있지만 실제로 설빔이 눈에 띄게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설빔이란 으레 가정에서 어머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이었다.

나는 기억한다.

세모(설을 한달 열흘쯤 앞둔)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구들목에 자리하시고 어머님이 침모와 함께 내 옷(설빔)을 만들고 계신다.

화로에 인두가 꽂혀있다.

어머님의 입에서 때로 수심가가 새어나온다.

자기 곁으로 나를 부르시고 화롯불에 묻어두었던 밤을 집어내 주신다.

어머님의 얼굴이 더욱 어머님답게 보인다.

설날이 손꼽아 기다려진다.

음식도 그렇다.

돌아가면서 친척집 여인들이 품앗이를 든다.

떡을 치고 강정을 버무리고 약과와 정과를 다듬고 하는 그 언저리를 하루 온 종일 빙빙 돈다.

그 날이 공일이었나보다.

솥뚜껑을 거꾸로 달아놓고 장작을 지펴 프라이팬으로 쓴다.

전을 뜬다.

파전 무전 녹두전 등이다.

산적도 굽는다.

생선도 지진다.

역시 그 언저리를 빙빙 도는 나를 불러 세워 어머님은 내 입에 전 한쪽을 얼른 물려주신다.

먼 발치서 이런 광경을 눈을 가느다랗게 뜨시고 조모님이 몰래 바라보신다.

나는 그 시선을 따갑게 느낀다.

나는 왠지 마음이 흐뭇해진다.

그 분위기는 그지없이 아늑해 보이고 포근해 보인다.

간혹 누가 우스개를 했는지 손뼉들을 치며 한동안 소란을 피우기도 한다.

하여간에 이런 따위가 설이란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풍경들이요 정서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요즘은 옷도 사 입히고 음식도 사서 먹는다.

떡가래까지 잘게 썰어서 봉지에 넣은 상품이 나와있다.

세상은 몹시도 편리해졌다.

손이 훨씬 덜 가게 됐다.

그러나 그 대신 아주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것 같은 허전한 느낌이다.

나와 같은 세대는 그것을 절실히 느끼리라. 새로워진다는 것이 변한다는 것이라면 새로워진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현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거듭 말하지만 나쁘게도 변하기 때문이다.

날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라는 말이 있다.

이때의 새로워진다는 것의 내용은 두 말 할 나위 없이 개량되고 향상된 방향으로 그렇게 되라는 그런 것이다.

새해에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는 때로 이런 따위 말들이 가진 흡인력에 빨려들게 된다.

역사는 무한정으로 옳은 방향으로만 나가는 것은 아니다.

자명의 이치다.

시인 보들레르가 한 말이 있다.

돛배가 증기선으로 바뀐다고 진보라고는 할 수 없다고 - 물론 배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진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의 구제라든가 행복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신학자 니버는 근대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자연의 이해에 있어서는 치열하고 투철했지만 인간의 이해에 있어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천박했다고 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인간을 너무 겉으로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요즘은 인간평가도 기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지금 산업사회로 무르익어 고도정보화로 접어든 시대에 살고 있다.

농경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누가 그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인간은 어느 시대 어떤 환경 속에 살고 있다하더라도 인간을 떠날 수는 없고 떠나서도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는 것이다.

설 풍속과 설 정서도 옛날 그대로 살릴 수는 없다.

건전하게 새 시대에 어울리게 한 번 만들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하는 소리다.

요즘은 설 정서가 없어졌으니 설도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인간성이 그만큼 마멸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나는 이 말을 조금도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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