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들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이역만리로 등을 떠민 것은 벗어날 길 없는 지독한 가난과 구한말의 혼란이었다.
특히 1901년부터 2년간 함경도 등 전국을 휩쓴 가뭄과 홍수는 땅에 온가족의 목숨을 부지했던 많은 농민들을 유랑민들로 전락시켰다.
마침 이 때 먼저 하와이로 이주한 중국인과 일본인 노동자들의 노동쟁의로 골치를 앓던 노동집약적 사탕수수 농장주들이 순박한 민족의 땅 한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와이 원주민들의 사탕수수 밭을 빼앗은 미국인들은 새로운 노동력 확보를 위해 중국인 5천여명을 하와이로 끌어들였지만 농장탈출과 상거래 종사 등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1885년부터 1902년까지 6만명의 일본인 노동자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전체 노동자의 90%를 차지한 일본인들은 미국인 농장주들을 상대로 임금인상과 근무여건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으로 맞서 미국 정부가 동양계 이민을 규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 농장주들은 값싼 임금과 성실한 동양계 노동자의 지속적인 확보를 위해 가난이 고질화된 한국인들을 노동자로 쓰기 위해 고종 황제와 친밀한 관계에 있던 미국 영사 앨런을 통해 한인 이민 추진을 도와줄 것을 요청한다.
이어 앨런은 고종을 만나 설득한 뒤 미국인 데슬러를 통해 인천에 이민을 전담하는 동서개발회사를 설립한 뒤 교회 등을 통해 하와이 이민 희망자 모집에 나섰다.
당시 "하와이는 기후가 온화해 더위와 추위가 없고 무료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1년 내내 직업을 얻기가 용이하다"는 모집광고에 "하와이에는 나무에도 돈이 열린다"는 소문이 더해져 전국에서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인 지원자들이 대거 몰렸다.
1902년 12월22일 102명의 한인이 갤릭호에 승선, 1903년 1월13일 하와이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1905년까지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은 7천226명에 이른다.
하와이 이민을 공식적인 첫 이민으로 간주하는 것은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대한제국이 수민원이란 담당기관을 설립, 처음 추진한 공식 해외 인력송출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78년 하와이 이민 1세대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조사에서 파악된 이민동기는 '일확천금을 노리고' '서자의 설움 때문에' '남자들의 횡포가 싫어서' '일본의 압박을 참을 수 없어' '자손들을 좋은 곳에서 키우기 위해' '모험심에서' 등 다양하게 나타났다.
강병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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