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이민 100년의 숨결-(2)신천지 하와이-1.초기 이민사회

입력 2003-01-06 17:02:25

100년 전 3주 동안 이민선의 3등석에서 배멀미에 시달리는 긴 항해 끝에 하와이의 드넓게 펼쳐진 사탕수수 밭 앞에 선 한인 이민 1세대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국에서의 가난한 삶이 너무도 싫어 새로 찾은 기회의 땅, 신천지를 앞에 두고 마냥 희망에 부풀어 환호했을까. 아니면 낯선 이국 땅에서 앞으로 닥쳐올 고난과 역경을 예감하며 한숨을 내쉬었을까.

하와이 거주 한인들은 "미지의 땅을 밟은 초기 이민 선조들은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환경이 너무 가혹해 기대는 한순간에 허물어지고 실망과 불안이 대단했다"고 입을 모았다.

하와이 이민의 여정이 순탄치 않았던 것이다.

쪽빛 바다와 푸른 하늘이 눈을 지치게 할 만큼 아름다운 남국 풍경도 농막처럼 생긴 한 건물에 수십명이 같이 숙식하며 고난의 삶을 시작한 이민 1세대들을 위로할 순 없었다.

가족이 있는 한인은 칸막이가 있는 조그만 독채방을 배정받았으며 식사는 농막 거주자 전원이 함께 하거나 어떤 농장에서는 여러 농막 노동자 모두 한 곳에 모여 같이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는 한인 뿐만 아니라 중국인, 일본인, 필리핀인, 중남미인 등이 있었으며 백인들이 노동자를 감시했다.

1903~1905년 사이에 이주한 한인들은 무더운 태양 아래 사탕수수 밭에서 아침 6시부터 매일 10~12시간씩 허리를 구부린 상태로 억센 수숫대를 칼로 잘라내 등에 지고 기차나 마차에 싣는 고된 작업을 했다.

수숫대에 찔려 손과 팔에 피가 맺힐 때가 다반사였다.

잡초제거나 수숫대 쌓는 일은 여자와 나이 든 아이들의 몫이었다.

한인 노동자들은 수수대가 3, 4m나 자라 통풍도 잘 안되는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마치 노예처럼 작업복 가슴에 번호판을 달고 작업을 독려하는 감독의 채찍을 맞아가며 일했던 것으로 후손 사회에 알려졌다.

그러나 하와이 이민사를 연구하는 이덕희(62·여) 미주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하와이위원회 부회장은 "감독자가 위엄을 부리느라 채찍을 들고 다녔고, 못된 성격의 감독자가 종종 노동자를 심하게 다루긴 했지만 어려웠던 농장얘기가 와전돼 많은 사람들이 한인 이민자들이 노예생활을 했다고 잘못 알게 됐다"며 "개인사정을 무시한 농장의 규칙생활과 제도의 압박감이 노동자들에게 지옥같이 느껴졌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인들이 힘들게 일하고 받은 일당은 60~70센트로 한달(일요일 및 공휴일 제외)에 백인 노동자의 10% 수준인 남자 15~18달러, 여자 12~14달러에 불과해 식비와 세탁비 등을 지불하고 나면 순수입은 9~11달러가 고작이었다.

'나무에 돈이 주렁주렁 열린다'고 선전된 지상낙원에서 황금을 한 손에 쥐고 금의환향하겠다는 꿈에 부풀었던 초기 이민자들은 비참한 농장생활 때문에 귀국할 날만 고대하기도 해 이런 사실이 고국에 알려지면서 이민 희망자가 감소하기도 했다.

당시 한인 이민자 중 농민은 15% 뿐이고 대부분 도시 빈민노동자와 하급관료, 군인, 학생, 광부, 머슴, 정치망명객 등이라 열악한 노동강도를 더 뼈저리게 느꼈다.

65% 가량은 한글을 쓸 수 없는 문맹인데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불가능, 고난과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한다.

사탕수수 일에 익숙해지고 현지 사정을 알게되자 계약경작을 하는 한인들도 생겨났으며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하거나 쌀농사를 짓기도 했다.

역경을 딛고 성실하게 저축하는 한인들도 많았고,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걱정하며 임금의 30%를 독립자금을 내놓는 등 독립운동을 적극 도모해 1920년대까지 임시정부 등에 헌납한 액수만 요즘 가치로 2억달러가 족히 되는 200만달러에 달했다.

이 부회장은 "초기 이민자들은 돈을 벌어 독립자금과 함께 동포구제사업, 자녀교육에 모두 써버린 애국자"고 강조했다.

하지만 힘겨운 노동과 궁핍한 삶에 대한 위안을 받을 가족이 없었던 일부 노동자는 술이나 도박 등 문란한 생활로 고통과 외로움을 달래기도 했으며 농장을 탈출하는 등 노동자들의 유동현상도 나타나게 된다.

이에 따라 1905년 7천여명의 이민자 중 오아후섬 에바농장에 가장 많은 500명을 비롯, 4천900여명만 32개 사탕수수 농장에 살았고 마우이, 하와이(빅아일랜드), 카우아이섬 순서로 흩어져 있었다.

한인 2세인 김창원(75) 미주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총회장은 "한인들은 3년간의 계약노동이 끝나자 아내의 독촉이나 1차 세계대전의 호경기로 사탕수수 밭을 떠나 호놀룰루 등 도시로 진출하는 사례가 급증했고, 특히 여자들은 세탁업 등 남자들보다 일거리가 많아 도시생활에 빨리 적응했다"고 말했다.

도시로 떠난 한인들은 목수, 부두노동, 정원사, 수위, 집관리, 식당일 등 단순노동에서 시작해 잡화상, 양복점, 자동차업, 가구점, 구둣방, 여관, 약방, 농장 경영 등 기술과 자본이 필요한 영역으로 직종을 넓혀갔으며 상당수는 세월이 경과하면서 LA 등 캘리포니아주를 비롯해 본토로 옮겨갔다.

1910년 인구조사에서 하와이 한인 수는 4천400여명으로 줄었으나 여전히 미국에서 가장 많은 한인이 살았다.

첫 이민자들의 정착지였던 와이알루아 일대는 현재 한인 후예들이 모두 빠져 나가고 서핑으로 유명한 소규모 해양 휴양마을로 바뀌었으며 하와이 전역에 존재했던 사탕수수 밭은 일부만 남고 파인애플과 아보카도 농장으로 변해버렸다.

하와이 호놀룰루=강병균기자 kbg@busanilbo.com

사진 강선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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