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람이 윙윙거리는 동구에 서서 마을을 바라보니 과연 숱한 인재를 배출한 마을답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궁궐을 연상케 할 정도로 웅장한 종택과 서원에 버금가는 종택 장서각의 규모, 처마를 맞댄 채 즐비하게 이어진 고가들은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안은 수백년생 소나무숲과 어우러져 400여년을 세거해 온 이 마을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안동 시내에서 영덕 방면 국도 34호선을 따라 10여㎞쯤 가다보면 임하댐 보조 호수 주변의 나지막한 야산을 따라 고가옥들이 줄이은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의성 김씨 청계공파 종가가 400여년간 자리를 지켜 온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흔히 '내앞마을'로 불리는 이 곳은 풍수지리설로 볼 때 완사명월형국(浣紗明月形局:은은한 달빛아래 비단을 씻어널어 놓은 듯한 지형=글을 좋아하는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는 지형)이라 하여 삼남 4대 길지의 하나로 전해 온다.
지난 1992년 임하댐이 축조되기 전에도 마을 앞에는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半邊川)이 굽이쳐 흘렀다.
그래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 천전(川前), 즉 내앞이다.
보통 댐 같은 대규모 인공 구조물이 들어서면 마을 분위기가 마구 헝클어지기 십상이지만 다행히 이곳은 그렇지가 않다.
임하댐이 들어서면서 마을앞에 인공호수가 조성됐으나 강이 호수로 바뀌었을 뿐 전형적인 배산임수형태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 남쪽 호수변을 따라 길게 늘어 선 수백년생 소나무가 우거진 개호숲은 한마디로 놀라움 그대로다.
130여 가구에 주민 370여 명이 사는 고색 창연한 마을 분위기와 어우러져 그야말로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특히 '개호(開湖)'라는 숲 이름은 400년 후 이 곳에 강(江)이 사라지고 호수(湖水)가 열린다는 사실을 이미 예견하는 듯 해 감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선조(宣祖) 38년인 1605년의 대홍수 이후 마을 입향시조 김만근 선생이 풍수지리상 내앞마을 남쪽이 허(虛)하다 하여 강변을 따라 한 십리쯤 소나무를 심었지. 그때 운천선생이 숲을 대대로 보존하라며 만드신 문중규약 '개호금송완의(開湖禁松完議)'를 지금까지 엄중히 지켜오면서 400여년 동안 단 한번도 숲에 쟁기를 댄 적이 없어요".
안동향교 전교를 지낸 김춘대(74)씨의 말 속에서 400여년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자연보호 운동이 이곳에서 대대로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입향시조의 손자인 청계 김진 선생 대에 이르면서 청계공파 의성 김씨를 '내앞 김씨'라고 일컬을 정도로 가문이 크게 번성했다.
퇴계 학통을 이은 학봉 김성일 등 약봉.귀봉.운암.남악 등 글을 워낙 좋아한 선생의 아들 5명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명망이 높은 학자로서 이름을 떨쳤다.
임진왜란때 선조 임금의 행궁을 수행한 운천(김용). 대사간을 지낸 지촌(김방걸), 그리고 제산(김성탁).서산(김흥락) 선생 등은 퇴계학맥의 삼고봉을 이루는 영남 유학의 거장으로서, 사림에 명성을 남길 정도로 올곧은 이들의 선비정신은 청계공 문중의 일관된 내림이다.
성삼문.하위지와 과거 동문인 집현전 학사 김한철 선생은 단종이 폐위되자 곧바로 귀향,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국내 최초의 근대학교인 협동학교를 이 마을에 세워 청년운동을 하다 만주로 건너 가 구국의 제단에 몸을 바친 일송 김동삼 선생을 비롯해 일제 강점기에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낳았다.
특히 청계공 후손들의 선비정신은 근세까지 이어져 일제 36년 동안 일부 교직을 빼고는 아예 관계 진출을 외면하는 등 곳곳에서 충효정신으로 묻어난다.
고전문학을 전공, 안동대에 출강하고 있는 종손 김명균(46)씨는 "호수 건너 절벽위에 지은 백운정(白雲亭)은 청계공이 부모님의 산소를 쳐다보며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하던 곳"이라며 "풍류의 상징인 일반 정자와는 달리 의성 김씨 문중의 효 정신을 대대로 일깨워 주는 정자"라고 자랑했다.
마을엔 명성에 걸맞게 고가옥이 즐비하다.
대표적인 고가옥은 단연 큰 종택(청계종택). 청계공의 부친인 김예범 선생이 분가했을 때 지은 집으로 선조 20년(1587년)때 화재로 소실됐으나 이듬해 학봉 김성일 선생이 중건했다.
입 구(口)자형 안채와 날 일(一)자형 사랑채가 행랑채 등 다른 부속건물과 결합한 구조로 높은 계단 등 전체적으로는 궁궐 모습을 띤 뱀사(巳)자 형. 특이한 형태는 종택을 직접 설계한 학봉 선생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눈여겨봐 둔 중국 재상집을 본떠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큰 종택 동쪽에 있는 작은 종택(귀봉종택.경상북도 민속자료 35호)은 1660년 건축돼 조선 중기 전형적인 양반 종가 양식을 갖춘 건축물로 고종 25년(1888년) 김수일 선생 12대손인 김주병 선생이 중수했다.
홑처마의 팔작지붕으로 입 구(口)자형이며, 대문채 사랑채 안채 사당채 등으로 구성돼 있다.
종택에는 운천 김용선생이 임진왜란때 선조 임금을 호종하며 쓴 '호종일기'(보물 484호)를 비롯 그 유명한 의성 김씨 문중의 4보(四寶) 옥피리, 문장검(칼), 연하침(목침), 매죽연(벼루) 등을 간직해 왔다.
그러나 커다란 종택을 노쇠한 종손종부들이 지켜야 하는 형편은 이곳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최근엔 도난을 우려해 유물들을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중이다.
옆 마을인 빗골에도 김성탁 종택과 김헌수 고택, 김대락 고택인 백하구려(白下舊廬.경상북도 기념물 137호) 등 의성 김씨 400년 세거지를 확인해 주고 있는 고택들이 즐비하지만 그냥 음식점으로 사용되거나 아예 방치되고 있다.
오랜 역사를 품에 안은 목조 고가옥들이 풍설에 사그라들고 있는 모습은 보기에 안타깝기만 하다.
종택을 중심으로 빗골.운곡.모실.장고날 등 4개 마을로 둘러 싸인 내앞마을은 지난 1986년 임하댐 설계당시 댐 수몰지역에 포함됐었다.
그러나 문중의 세찬 반발에 부딪쳐 지금처럼 둑을 쌓아 수침을 막을 수 있도록 설계를 변경, 가까스로 수장을 면하고 지금에 이른다.
권동순기자 pinok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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