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숙씨 경남 하동군 진동면. 1883년 9월1일생 1948년 8월29일 별세' '리 우드 리 녀사 대한국 경상남도 부산. 1900년 6월11일생 1948년 5월7일 별세' '대한인 양산 출신 안 수산나 녀사. 1920년 별세'.
미국 하와이 주섬인 오아후섬의 호놀룰루에서 북서쪽으로 70㎞ 가량 떨어진 조그 만 해변마을 와이알루아 외곽에 위치한 푸우이키 묘지에 전혀 관리되지 않고 방치 되거나 파손된 50여개 한인 묘비명의 일부다.
수십년간 잡초만 무성한 이국땅 묘지에 묻혀 쓸쓸히 잠든 이들은 구한말 한인들의 미주 이민의 시발점인 와이알루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던 한인 노동자나 부인 , 자녀 등 이민 1, 2세대들이다.
오는 13일은 한인들이 태평양 한가운데 머나먼 타향,'돈나무가 자란다'는 하와이 에 정착한 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다.
1902년 12월22일. 남자 54명과 부인 21명, 자녀 25명, 통역 2명으로 구성된 102명 의 한인들은 가난이 싫어 제물포(인천)에서 신천지에 대한 꿈을 안고 쇼센기선 회 사의 켄카이호에 몸을 실었다.
이들은 1903년 1월2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미국 상 선 갤릭(Gaelic)호로 갈아 탄 뒤 열흘간의 항해끝에 13일 새벽 3시30분 호놀룰루 항 제2부두에 첫발을 내디딤으로써 꿈의 실현과 고난으로 점철된 미국 이민역사의 막을 열었다. 이들은 곧바로 기차를 타고 와이알루아 플랜테이션의 모쿠레이아 캠프로 옮겨가 정착했다.
기록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이 때부터 1905년 7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이 민금지령이 내릴 때까지 모두 65회에 걸쳐 7천226명(미주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집계)의 한인이 새로운 삶을 찾아 하와이로 가 사탕수수 노동자로 일했다. 이 중 2천여명은 1910년까지 LA와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본토로 진출했고, 1천여명은 귀국했다.
하와이에 불었던 두번째 이민 물결은 '사진신부(Picture Bride)'였다. 1910년부터 24년까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진속의 나이 든 예비신랑을 만나거나 가족을 남겨두고 고국을 떠난 지아비와의 재결합을 위해 951명의 신부들이 태평양을 건넜 다. 당시 사탕수수 노동자의 84%가 독신 남자들로 결혼문제가 이민사회의 이슈로 떠올랐다.
특히 모집광고를 보고 하와이 한인들에게 시집간 여성의 80% 가량은 부산과 밀양, 안동 등 영남출신들이었다. 이중 150여명은 1928년 9월27일 여성 상의회 성격의 최초의 한인 지방조직인 영남부인회를 결성, 활발한 사회 경제활동을 벌여였다.
이 단체는 1940년 10월 발족,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하와이 유력단체인 한인상 의회의 효시가 됐다. 영남부인회는 영남부인실업동맹회로 이름을 바꿔 △저축장려 △국산품 수입을 통한 고국 실업발전 △동포간 사교와 친목도모 △회원 상부상조 및 안녕보장 등에 힘쓰며 힘겨운 이민생활의 기초를 닦았다.
사진신부는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에서 회비를 조금씩 떼는 소극적 여성이 아니라, 남편이 일하는 사탕수수 밭에 나가거나 빨래, 삯바느질 등 부업을 통해 생계를 함께 책임지면서 자그마치 300만달러의 독립자금을 내놓은 적극적인 부인들이었다
미주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하와이위원회 이덕희(62.여) 부회장은 "미국 초기 이민사는 남자들의 것이 아니라 고국과 만주의 독립군을 지원하고 동지회와 국민 회의 독립운동에도 적극 가담한 여성들의 역사로서, 여자들의 억척같은 삶은 가정 을 경제적으로 안정시키고 하와이가 광복운동의 거점이 되는 원동력이 돼 한국 맞 벌이문화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지난 47~67년 미군과 결혼해 남편의 발령지 하와이로 이주한 속칭 '평화부인 '과 미국 가정에 입양된 한국전쟁 고아, 유학생들의 이민이 이어져 미국 각지로 흩어졌다.
마지막으로 68년 이후 미국 이민법 개정으로 미국 본토로의 자유이민 행렬이 계속돼 2002년 3월 현재 미국에는 하와이 4만여명 등 122만8천여명의 한인 들이 살고 있으며 불법체류자 등을 합하면 한인사회 규모는 최대 200만명으로 추 정된다. 이들은 경제적 안정과 성공에 이어 한인 위상을 높이며 미국 주류사회 진 입이라는 '제2의 아메리칸 드림'을 조금씩 실현해 가고 있다.
미국 이민보다 2년 늦은 1905년 3월6일. 또 다른 이민선이 구인광고를 보고 부산, 대구, 울산, 마산, 경주 등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모여든 275가구 1천33명(남자 7 02명, 여자 135명,어린이 196명)의 한인들을 태우고 제물포를 떠나 부산과 일본을 거쳐 70일간의 항해와 3명의 사망자를 낸 끝에 미지의 세계인 멕시코 동부 유카 탄반도의 카리브해 연안 프로그레소 항구에 도착했다.
가난 때문에 조국을 등진 유민들 틈에 구한말 일제의 폭압을 피해 도피처로 삼은 정부관리도 섞인 이들은 즉시 인근 메리다 지역에 집중된 선박용 로프의 원료인 애니깽을 생산하는 22개 농장에 분산 수용돼 전혀 예상치 못한 노예의 삶을 시작 한다. 이상향을 그리던 한인들은 불같이 뜨거운 가시밭에서 채찍을 맞아가며 일하 고 밤이면 토굴같은 움막에서 잠자며 쥐꼬리같은 품값으로 가축신세만도 못한 상 태로 연명해야만 했다. 멕시코 이민은 단 한번으로 끝났다.
멕시코 한인들은 혹사당하는 처절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각종 한인단체를 조직, 중 국 상하이와 LA로 독립자금을 모아 전달하며 민족혼과 정체성을 지키려 애썼으나 하와이 등에 가려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계약기간이 끝난 한인들은 20가구 70 여명만 귀국선을 탔으며 일부는 미국으로 가기도 했으나 대부분 돌아갈 조국이 없 어 멕시코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진 뒤 이국만리 하늘을 떠도는 고혼이 되고 말았 다.
1915년부터 멕시코만의 코앗사코알코스로 진출한 부산지역 어부출신 20여명의 경 우 어업을 시작하며 원주민들에게 고기잡는 법을 전수해 항구도시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민 1세대의 후손들은 메리다와 멕시코시티 등지에 1만여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다수의 후예들이 전문분야에서 멕시코 사회에 기여하고 있 다. 그러나 순수한 한인 혈통은 손에 꼽을 정도로 이들은 서툴게 한국말을 쓸 수 있는 실정이다.
멕시코 이민자 중 291명은 1921년 3월11일 근로조건이 훨씬 좋은 쿠바의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기 위해 유카탄을 출발, 쿠바 마나티항에 도착했으나 국제 설탕가격 폭락으로 사탕산업이 침체하자 마탄사스 일대 애니깽 농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중 남미 이민의 효시를 이룬다.
쿠바 이민자들 역시 마탄사스와 아바나, 카르데나스에서 한인회를 만들어 독립운 동 자금을 모아 지원하는 등 애국심을 발휘했다. 현재 1세들이 모두 죽고 5, 6세 대까지 내려간 720여명의 후손들은 순수혈통이 8%에 불과한 데다 장기간 고국과의 교류단절로 한글과 한국문화를 잃어버린 채 현지인에 급속히 동화돼 극심한 정체 성 위기를 겪고 있다.
멕시코와 쿠바의 한인 후예들이 기민(棄民)과 다를 바 없는 처지에서도 일부에서 한글과 전통문화 배우기 등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특유의 끈기와 근면성으로 자기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은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이제는 정부차원에서 비운의 현대사가 남긴 어쩔 수 없는 비극이었다는 핑계를 접 고 재외동포는 민족의 자산이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이들을 감싸 안는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하와이=글.강병균기자 kbg@busanilbo.com
사진.강선배기자 ksun@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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