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은 우리 사회사에 기록될 중요한 한 해였다. 오랜 숙원이었던 '시민사회'의 싹이 확실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올해였다. 냉소적이기만 하던 젊은 세대들이 인터넷으로 연대를 형성한 뒤 드디어 사회의 주인으로 떠오른 것도 올해였다. 진정한 '인터넷시대'라 부를만한 세상이 열린 것도 마찬가지.
그러면서 대구로서는 첫 민선시장이 물러나고 두번째 민선시장이 취임하면서, 지난 7년간 그렸던 대구 대개편의 그림들이 완전히 지워지고 새 그림 그리기가 착수됐다.
◇시민사회 싹을 내밀다= 젊은 세대가 부상할 것이라고 예고한 것은 월드컵 대회였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서 일체감을 형성했다. 붉은 셔츠떼의 출현은 단순한 축구 열광의 현상만은 아니었다. 표출하고 싶었던 그 자아가 월드컵 대회라는 통로를 얻은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팀은 4위까지 진출함으로써 그 불길에 기름을 부어 주었다.
그 마지막 경기는 마침 대구에서 열림으로써 대구 젊은이들의 깊은 가슴 속을 분출토록 했다. 30만명의 시민들은 국채보상공원, 시민운동장 야구장, 두류공원, 전시컨벤션센터, 범어네거리로 뛰쳐나가 거대한 시민군단을 만들어 보였다.
젊은 피에 또한번 분출구를 열어 준 것은 미군 장갑차 희생 여중생 추모 행사였다. 한반도는 12월 한달 내내 촛불바다를 이뤘다. 촛불 바다는 시민들의 의식이 이미 옛날과 다르다고 외쳤다.
세계는 한국에 진정한 주권의식이 이만큼 성장했음을 지켜봐야 했다. AFP통신은 지난 16일 "촛불 바다가 서울 주재 미대사관을 삼켰다"는 제목의 기사로 그 놀라움을 전했다.
이러한 시민사회로의 진군은 인터넷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월드컵은 네티즌들의 결속을 촉진시켰고 촛불 든 손들을 거리로 모이게 했다. 인터넷은 누워있던 한국의 젊은 영혼들을 일깨워 묶어 줌으로써 하나의 힘으로 부상시킨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시민사회에의 희구는 젊은이들만의 것이 아니었음도 곳곳에서 드러났다. 참가자는 삽시간에 코흘리개에서부터 칠순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령층으로 넓어졌다. 지난 17일 대구 동성로의 여중생 추모 평화대행진에 7천여명이나 몰리자 시민들은 스스로 감격해 했다. "1987년 6월 항쟁이후 이렇게 많은 시민들이 모인 것은 처음 본다".
시민들의 이 열정은 마침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개혁' 요구로 응집됐다. 인터넷시대를 증명하듯 유례없는 미디어 선거로 진행됐고 아웃사이더였던 20, 30대 '뉴제너레이션'은 결집력을 바탕으로 개혁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보다는 나라와 정치와 사회가 어떻게 개혁되고 발전해 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넘어야 할 산이 적잖음도 이 과정에서 재확인됐다. 이제 개혁과 수구의 공방전이 본격화될 것이다. 월드컵 열기를 업고 시동했던 대구 시민축구단 창단 기금 조성과정에서 불거졌던 부조리한 모금 형태와 그에 대한 시민 반발도 결국은 넘어야 할 또하나의 산을 놓고 벌어진 공방일 터이다.
◇대구 발전전략 전면 수정= 지난 6월 치러진 대구의 지방선거에서는 시장, 중·서·남구청장이 바뀌었다. 시장·구청장은 한나라당이 휩쓸었고 시의원 27명 중 26명도 한나라당 소속이었다.
조해녕 신임 시장은 문희갑 전 시장이 추진해 온 정책을 대부분 폐기했다. '대구경제 활성화 계획'은 현실정에 맞지 않다며 '대구 장기발전계획' 및 '대구 산업발전 기본계획'으로 대체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 조 시장은 '낙동강 프로젝트'를 들고 나섰다.
반면 3선을 기대하던 문희갑 전 시장은 선거 비자금 조성설에 휘말려 도중 하차했다. 문 전 시장은 1995년 7월 첫 민선 대구광역시장에 취임한 후 대구의 구조를 완전히 바꾸겠다는 원대한 구상을 현실화했었다.
위천단지를 만들어 대기업을 유치함으로써 중소기업 중심의 취약한 산업구조를 변화시키고, 그 대신 시가지 공단들 자리는 택지로 재개발해 도시답게 꾸미겠다고 했다. 시 중심부에는 승용차 진입을 최대한 막을 수 있도록 하겠다며 갖가지 정책을 마련했다.
그는 당장 대구가 발전하기 보다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는 전략 아래 도로건설, 전시컨벤션센터 건립, 월드컵경기장 건설 등 굵직굵직한 SOC 사업들을 추진했다. 도시의 국제화를 위해 유니버시아드를 유치했고, 민간기업 참여를 유도해 두류공원 야외음악당과 오페라하우스도 만들었다. 이런 일들은 문 전 시장의 추진력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흔들리지 않는 평가이다.
문 전 시장은 그러면서 "빚을 내서라도 일을 벌이는 것이 대구에 이익"이라는 판단을 했다. 하지만 조 시장에겐 그로 인한 부채가 고스란히 부담으로 인식됐다. 조 시장은 방만함을 줄이고 부채를 줄이는데 초점을 맞췄다. 갚아야 할 돈이 2005년까지 매년 5천억원을 넘어서서는 어떤 새 사업도 벌일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조 시장은 대구 구조개편의 핵심이었던 위천단지 건설을 포기했다. 대구 발전의 발목만 잡을 뿐 이루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조 시장은 대신 이곳에 e밸리를 조성하면서 현풍신도시·대니산 등을 묶어 테크노폴리스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첨단업종이 유치되고 휴양·오락시설이 들어서면 부가가치 생산력에서 위천단지 못잖은 성과가 기대된다는 것이다.동시에 대구시는 서대구·3공단 택지화 계획도 백지화했다. 이곳들은 도시형 첨단산업기지 및 신공단으로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최정암기자 jeongam@imaeil.com
이종규기자 jongku@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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