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예기치 못하였던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우리는 흔히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는 말을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 사건이 사회에 미칠 결과를 예측할 수 없을 때도 우리는 '드라마'를 떠올린다. 이제 막을 내린 21세기의 첫 대선(大選)은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한편의 드라마였다.
정치 자체가 '드라마'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민주주의 정치의 이념을 발전시킨 고대 그리스에서 '드라마'란 본래 '새로운 사건'을 의미하였다. 이제까지의 패러다임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사건이 발생할 때,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그것은 한편의 드라마처럼 다가온다.
이번 선거가 한편의 드라마였지만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국민경선'을 통해 최고를 기록하였던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곤두박질쳤다가 다시 '여론조사'를 통한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를 통해 바람몰이를 한 과정은 이 드라마에 설치된 복선이었다.
정당의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것이 어떻게 '국민경선'일 수 있는가? 동서고금을 통해 여론조사로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나라가 어디 있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어떠한 대답이 주어지든, 중요한 것은 국민경선과 여론조사는 특히 방송매체와 결합함으로써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엄청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의 성공이 미디어 정치 덕택이라면, 이회창의 실패는 한 마디로 시대의 전환을 읽어내지 못한 홍보전략의 참패에서 기인한다. 공약의 내용이 비슷하면 할수록, 이미지의 영향력은 그만큼 더 증폭된다.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듯한 서민적 미소, 시민의 애환과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듯한 눈물, 당의 이름보다는 대한민국 후보임을 내세움으로써 은연중에 드러낸 개혁 의지. 이러한 이미지들은 한결같이 이회창 후보의 명료한 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인간사가 그러하듯이 강점은 항상 약점이 될 수 있다. 노무현 후보의 당선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이미지에 담겨진 메시지에 주목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미지 선거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盧당선자가 노풍을 일으킨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낡은 정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혁신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40대로 진입하고 있는 386세대를 포함한 젊은 세대들이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성향과는 상관없이 노무현을 지지하였다는 사실은 이 점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물론, 사회가 변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사회로 변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지만 기존 사회가 변화 자체를 거부할 정도로 경직되어 있다면, 좋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변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보편화된다. 노무현 당선자는 바로 이러한 사회저변의 변화기류를 올바로 포착하고 이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었기에 한편의 멋있는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돈도 조직도 학벌도 없지만 소신과 원칙이 있는' 대중정치인이라는 이미지,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의 가장 커다란 정치적 자산이었다.
그는 이제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소수의 정치세력만을 이끌고 있다는 냉혹한 현실이다. 한편에서는 거의 반에 이르는 국민들이 그를 여전히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여소야대의 정치구도가 버티고 있다. 이미지 선거의 이면이 드러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만약 그가 개혁을 실행하기에 충분한 정치세력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바람몰이 대중 정치의 유혹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도 조직도 학벌도 없다는 이미지는 그가 대통령이 됨으로써 이미 효력을 다하였기 때문에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원칙과 소신'뿐이다. 그가 이러한 자산마저 포기한다면, 그는 집권 내내 '개혁독재'와 '대중정치'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이미지 선거가 우리에게 남겨놓은 메시지이다. 노무현 당선자가 대통령으로서 어떤 역사적 드라마를 연출할지 우리는 이제 이성을 가지고 지켜봐야 한다.
이진우 계명대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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