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고의 세상읽기-결국 전통과 문화다

입력 2002-12-24 15:26:00

지난 12월 4일 일본 나고야(名古屋)대학에서 개최된 동아시아 향약(鄕約)에 관한 국제심포지엄은 여러 가지를 생각게 하는 모임이었다. 향약이란 13세기 중국 송(宋)나라에서 여씨(呂氏)형제가 창안한 일종의 자치규범인데, 주희(朱憙)가 증보한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이 15세기 조선에 도입되었다.

덕업상권(德業相勸), 예속상교(禮俗相交), 과실상규(過失相規), 환난상휼(患難相恤)의 정신이 양반뿐만 아니라 일반서민들의 마음에도 공감되어 경상도를 시발점으로 조선의 전역에 실시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1518년(중종15)에 김안국(金安國)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주자증손향약을 편찬케 한 것이 향약보급의 효시가 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후 퇴계(退溪)는 예안향약(禮安鄕約), 율곡(栗谷)은 해주향약(海州鄕約)을 작성하여 향민(鄕民)을 선도하였다. 향약이 권력층으로부터 하층민으로의 교화에 역점을 두었느냐, 향권(鄕權)의 쟁취를 위해 사족(士族)과 서민의 대립이 어떻게 전개되었느냐 등 학술적 연구과제는 아직 남아있지만, 조선왕조를 500년간이나 유지한 데에는 향약의 역할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중국, 일본, 베트남 향약을 비교연구하는 이번 모임에서 한국의 향약을 발표하면서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영남향약자료집성'(嶺南鄕約資料集成)이란 책을 일부러 들고 갔다. 전부 한문으로 인쇄되어 있기 때문에 외국학자들도 이해할 수 있어 한국에서 향약을 집대성하여 출판한 것을 매우 놀라워하며 칭찬해 주었다.

왜 이런 지나간 시대의 향약을 재론하는가? 무엇 때문에 21세기의 바쁜 학자들이 모여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하는 것일까? 그 직접적 계기는 베트남에서 출발한 것으로 들었다. 베트남이 공산화된 후 40년이 지나니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힘도 점점 탈색되고 은연중 전통문화와 생활예절이 부활한다는 것이다.

유교에 바탕을 둔 전통문화가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는 가운데 전통적 자치규범인 향약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베트남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알고보면 우리나라도 지난 1960년대의 새마을운동이 근본적으로 향약의 정신에 기초를 두었고, 70년대 이후 공동체(Community) 운동이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인류학자 골드버그(C. Goldberg)는 한국의 고향마을들이 공동체의 원형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설날과 추석에 국민의 절반이 찾는 고향에 일본의 '마츠리(祭)'같은 마을 축제가 없어 놀이문화를 잃어버렸다. 우리가 복원해야 할 공동체문화는 찾으면 많이 있다. 향약을 현대적으로 되살리려는 운동이 지역별로 전개되어 범죄없는 마을이 나오기도 한다.

국가법이 있는데 전통법을 실시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거나 낭만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거나, 향약이 현대화를 방해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오해이다. 오히려 자발적 참여정신은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도와주는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동아시아의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의 규범문화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된다. 정치와 이데올로기가 세상을 규율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것이다.지금 우리나라는 대통령선거 이후 민심이 동서로 갈라져 있고, 특히 세대간의 단절과 갈등이 격심하게 되었다.

한 나라에 살면서 이렇게 지방색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고, 부모와 자식의 대화가 단절되는 사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젊은 세대는 부모의 삶을 교훈이나 참고로 하려하지 않고 컴퓨터의 세계 속에서 전혀 새로운 공동체를 찾고 있다.

이것이 정치를 뒤집었다고 앞으로 한국사회 전반에 대대적 새대교체의 바람이 휘몰아칠 전망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결국 전통과 문화에로 돌아간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만일 그렇지않은 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그 사회의 불행이다. 우리는 역사를 긴 안목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이 그 동안 필자와 함께 해온 세상보기의 마지막 말이다.

서울대 법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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