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숄로호프와 솔제니친

입력 2002-12-23 14:01:00

'고요한 돈강'의 숄로호프가 '이반 데니소비치'의 솔제니친보다 훨씬 선배이고, 그의 출세작이 서방세계에 알려진 것과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도 솔제니친보다 크게 앞섰지만, 우리 독자들에게는 솔제니친이 먼저 다가왔었다. 이렇게 앞뒤가 바뀐 사정에는 냉전시대의 대한민국을 장악했던 반공 이데올로기를 빼놓을 수 없다.

러시아혁명의 내전을 배경으로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는 '고요한 돈강'은 오랜 세월 동안 얼음장 밑에 깔려 있다가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우리 운동권 젊은이들을 주요 독자로 삼으며 널리 퍼져나갔다.

반면에 기나긴 지하작가의 처지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오기 바쁘게 반체제 작가로 명성을 떨친 솔제니친은 일찍이 60년대 후반부터 우리 독서계에 낯을 익혔다. 그의 작품이 억압체제에 맞서 인간성을 옹호하고 있었고 당시의 남한 사회도 독재정권에 짓눌려 있었으니 솔제니친은 이 나라 공안당국의 검열에 마치 거미줄로 날아든잠자리처럼 맥없이 걸려들어야 했을 텐데, 사회주의 종주국에 저항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오히려 귀한 손님의 대접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들 선후배 작가가 한바탕 부딪친 적이 있었다. 아니, 선배가 후배를 일방적으로 걷어찼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다. 때는 1967년. '이반 데니소비치'로 노벨 문학상을 받으며 러시아의 골칫덩어리로 떠오른 솔제니친을 러시아작가동맹에서 추방하는 자리였다.

숄로호프는 편지를 통해'솔제니친이 작가동맹에 남는다면 내가 탈퇴하겠다'고 고함을 질렀다. 완고한 혁명적 할아버지의 신념은 솔제니친을 배반자로 보았던 것이다.결국 솔제니친은 조국에서 추방되었고, 아주 나중에 그의 염원대로 억압체제는 무너졌다. 미국에서 살다가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진 뒤의 조국으로돌아가는 길에 그는 괴롭게 토로했다. '미국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만한 사회가 못 된다'고.

지금 두 작가가 부활해 온다면, 숄로호프가 머리를 숙여야 하는가, 솔제니친이 머리를 숙여야 하는가? 아니면 둘 다 옳은가?

이대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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