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카드 사용이 일반화되고 금융기관들이 대출을 못해 안달일 정도로 돈 사정이 바뀌었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 가난한 이웃들의 돈줄이 돼 왔던 일수는 사라졌을까?
◇허리에 주머니 찬 할머니=지난 6일 오전 10시쯤 대구 칠성시장 야채전. 손님을 불러대는 상인들, 이 물건 저 물건 살피는 주부들, 소란스런 흥정,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잔돈을 바꿔주거나 예금을 거둬가는 신협 직원들….
그 한편으로 검은 바지에 돈지갑을 허리에 찬 손모(70.대구 신천동) 할머니가 바쁘게 걷고 있었다. 할머니가 도착한 곳은 3평 남짓한 허름한 점포. 콩나물.고사리를 30여년째 팔고 있다는 권모(72.수성동) 할머니가 간단한 인사를 건넨 뒤 미리 준비한 듯 1만3천원을 넘겨줬다. 손 할머니도 기계적인 동작으로 수첩과 도장을 꺼내 21번 자리에 도장을 찍었다. 손 할머니는 "소일 삼아 돈장사를 한 지 10년이 넘었다"고 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지만, 가난한 이웃들은 지금도 일숫돈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겐 계약서가 필요 없고 곧바로 급전을 구할 수 있는 일숫돈이 여전히 유용한 자금줄. 은행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겐 가혹할 뿐 아니라 가차 없이 연체료를 매기고 차압까지 해대는 반면, 일숫돈엔 장사가 시원찮을 경우 하루 이틀 미뤄도 되는 여유가 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칠성시장 양재현(63) 번영회장은 "2천400여 점포 중 10% 정도가 여전히 일숫돈을 쓰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수그러드는 일수=그러나 채소전에서 만났던 손 할머니는 "5년 전과 비교하면 일수 쓰는 사람이 80%나 줄었다"고 했다. 일수 놀이하다 돈을 떼여 망한 사람이 부지기수라고도 했다. 고추전에서 커피를 파는 유모(48) 아주머니도 "전에는 다니는 사람 10명 중 3명이 일수업자였지만 지금 이 시장에서 일수놀이 하는 사람은 이제 5, 6명에 불과하다"고 했다.
일수가 감소하는 원인은 여러가지인 것 같았다. 개인들의 높아진 경제력, 일반화된 신용카드 사용, 낮은 금리로 서민 대출을 파고드는 소형 금융업체 등장 등이 그것.
반면 어떤 상인은 일숫돈을 '뜨거운 감자'에 비유했다. 배가 고파 당장 먹고는 싶지만 삼키다간 입 안이 데어버릴 위험성이 있다는 것. 소액을 빌려주고 대체로 100일 동안 매일 원금의 1%와 이자를 받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일수의 이율은 통상 연 50% 수준. 100만원을 빌렸다면 매일 2, 3천원을 내야 한다.
영세상인들 중에는 일숫돈을 제때 못갚아 다른 일수를 빌려 돌려막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과일상 송모(40) 아주머니는 "이자를 감당 못해 잠적해 버리는 상인도 종종 있다"고 했다. 그 때문에 일수업자까지 덩달아 부도가 난다는 것.
◇서민들의 애환=칠성시장 야채전에서 30여년째 장사한다는 손모(63) 할머니는 IMF사태 후 장사가 너무 안돼 일숫돈을 쓰기 시작한 뒤 지금은 매일 갚아야 하는 돈이 20여만원에 이른다고 했다. 3명으로부터 각 500만원씩 빌렸기 때문. 그러나 손 할머니는 요즘은 장사가 안돼 돈 갚기가 너무 힘들다고 했다. 하루 3, 4시간밖에 못자고 열심히 일하는 사정을 아는 사채업자들이 편의를 많이 봐 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얘기였다.
29세 때부터 대구시내 한 시장 노점에서 과일.채소를 팔아왔다는 김분희(가명.68.대명동) 할머니는 지난 4월 이웃 상인(65)과 함께 일수로 200만원을 빌렸다가 그 상인이 잠적하는 바람에 혼자 떠안느라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하루 수입이래야 2만~4만원이 고작인 할머니가 매일 2만6천원이나 되는 돈을 갚기 힘들자 젊은 남자들이 찾아와 채소를 발로 차 엎고 입에 못담을 욕을 퍼부었다는 것. 매일 찾아온 이들은 할머니가 번 돈을 싹쓸이해 가버렸고, 할머니는 점심마저 굶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 돈은 이제 겨우 갚았지만 2년 전 빌린 일숫돈 100만원은 아직 못갚고 있다"고 했다.
이창환기자 lc156@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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