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대선과 이념대결

입력 2002-12-11 00:00:00

제16대 대통령선거가 목전에 다가왔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이념과 정책의 차이에 따른 정당구도의 개편을 가까운 미래에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3김 시대의 종언에도 불구하고 정당의 지역적 균열구도는 여전하다.

철새 정치인도 과거에 비해 엄청 늘었다. 다행히 '성공한 도박'으로 끝났지만, 집권여당에서 대통령후보조차 내지 못할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 엄청난 모험을 통해 민주당의 후보가 아니라 '국민후보'가 탄생했다.

정당의 이념과 정책의 차별성에 의한 선거운동이 아니라 후보자 개인 중심의 선거운동에 의해서는 또다시 '이회창당', '노무현당'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김대중 대통령이 만일 제왕적 대통령이라면, 차기 대통령도 충분히 제왕적 대통령이 될 조건을 확보하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이번 대선이 과거 어느 선거보다도 보수.진보의 이념적 대결구도를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진보성향의 유권자는 상대적으로 노무현 후보를, 보수성향의 유권자는 상대적으로 이회창 후보를 더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대선 후에 최소한 두 후보간 이념의 차이에 따른 정계개편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필자는 안타깝게도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우리 사회의 이념에 관한 많은 조사에서는 한국적 상황에서 진보.보수의 구별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한 축이고 남북한 관계를 둘러싼 체제문제나 미국과의 관계 등을 둘러싼 민족문제가 다른 한 축을 이루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념적 일관성은 매우 낮은 수준으로 나타났고, 그 결과 기업활동에 대한 정부의 개입 등 경제.사회.문화.교육 등의 여러 현안에 대한 의견은 진보.보수 성향과 별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지난 지방선거 후 실시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한 필자의 분석에 따르면, 진보.보수 성향은 연령을 통제할 때 현정권의 평가, 정당 및 후보 선택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진보.보수 성향을 통제한 후에도 세대간 차이는 현정권의 평가, 정당 및 후보 선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보수.진보의 이념적 대결구도는 주로 대북정책 및 미국에 대한 태도에서 뚜렷이 나타나지만, 실상 그 중 많은 부분이 세대간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성세대가 지난날의 경험에서 안보를 중시한다면 젊은 세대는 상대적으로 민족적 자존심의 회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지역갈등과 마찬가지로 세대간 갈등이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면, 이번 대선이 끝나면 세대간의 진지한 대화가 꼭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젊은 세대가 결국 미래의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주역이다. 그들의 행동이 다소 치기 넘치고 감성적이라 하여 억누르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설득하고 받아들일 만한 것은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평등한 한미관계의 요구가 바로 그 예다.

문화계.종교계.연예인 심지어 대학교수들이 함께 참여하는 SOFA 개정시위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가는 것은 그 동안에 우리에게 쌓인 것이 한꺼번에 폭발했기 때문인 것 같다. 매향리 및 노근리 사건, 오노의 '금메달 강탈사건', F-15 차세대 전투기 선정 등등에서 우리의 자존심이 엄청 손상되었던 것이다.

지난 주말 광화문의 촛불시위에서 주한미군철수 주장이 일절 등장하지 않은 것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시민들이 충분한 자제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평등한 한미관계를 원하는 젊은 세대의 요구에 맞춰 한미관계의 새 청사진을 차기정부는 마련해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이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의 이념적 차이가 이념과 정책의 차이에 따른 정계개편을 가져올 수 없다면 그 원동력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대선후보 TV 토론에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참여한 것이 토론의 긴장감을 떨어뜨린다는 의견도 없진 않지만, 권 후보는 다른 두 후보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이념과 정책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3자 토론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될 때, 이념과 정책에 기반한 정당정치의 실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정준표(영남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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