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석칼럼-유토피아와 정치

입력 2002-12-03 15:01:00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정치이념이든 유토피아를 약속한다. 유토피아를 약속하지 않는 자들은 정치 권력을 잡을 수도 없다. 하지만 인류의 정치사에서 유토피아가 실현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다. 앞으로도 유토피아가 실현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한편 유토피아를 약속하고, 다른 한편 꿈꾸는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정치적 현실임에 틀림없다.

선거철이 다가올 때마다 유권자들은 한탄하곤 한다. 이번에도 찍을 후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유권자의 기대치에 맞는 후보가 없다는 뜻이다.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후보는 많아도, 그 약속을 신뢰하는 유권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후보들의 공약과 유권자의 불신 사이에는 늘 정당이 이합집산하는 틈새시장이 형성되며, 그 시장틈에서 사람들은 한 표를 던지게 된다. 어김없이 당선자는 탄생한다. 이상적인 후보는 없어도, 어떤 식으로든 당선자는 나오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정치를 가능케하는 유토피아는 무엇이며, 유토피아를 공약하는 정치는 무엇인가? 현대적 의미의 유토피아와 정치의 어원은 그리스어에서 비롯된다. 유토피아의 어원은 '우-토포스(u-topos)'이다. 여기서 '우(u)'는 없다 내지는 아니다(non)를 의미하고, '토포스'는 장소나 어떤 곳을 의미한다. 따라서 유토피아는 정확히 '없는 장소'를 의미한다. 그렇다! 현실적으로든, 언어적으로든 유토피아는 한마디로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다만 없는 유토피아를 내세우고 꿈꾸는 곳이 현실일 뿐이다.

정치는 그리스의 폴리스(polis)에서 유래한 말이다. 폴리스는 사람들이 두루 잘 살기 위해 조성한 "도시"이다. 정치(politic)란 도시 사회적 삶과 지배의 기술을 의미하는 셈이다. 그러나 폴리스는 노예나 피지배층을 위한 도시가 아니라, 귀족이나 자유시민이 잘 살기 위한 도시이다. 그렇다면 정치도 귀족들이 평민이나 노예를 지배하며 살아가는 기술을 의미하리라. 어원으로 본다면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정치'란 귀족들이 "없는 곳"을 보이는 듯 제시하면서 평민을 지배하는 삶의 기술이다.

물론 21세기 한국의 정치가 곧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신귀족들의 지배 기술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어원적 의미가 21세기에 들어서서 처음 실시되는 대선을 위해 시사하는 의미는 지대하다. 지금 국민들은 무지개빛 공약 앞에서, 흑과 백을 짐작할 수 없는 작전과 폭로 앞에서 아연실색하고 있다. 그러나 일곱가지 무지개색깔을 섞으면 무색이요, 흑과 백은 매우 다른 것같지만 실은 같은 계통의 색깔이다. 이제 선택의 척도가 희미해지면서, 그 틈새시장이 형성되는 중이다.

민주적 정치 선진국은 어느 한 지도자의 약속이나 지배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민주 정치의 전제 조건은 정당 정치요, 21세기의 선진 정치는 정당의 선진성에 달려 있다. 그래서 국가가 부패하거나 쇠퇴하기 전에, 정당 정치의 구조가 부패하거나 쇠퇴한다. 반대로 국가가 부흥하고 안정될 때는, 먼저 정당이 부흥하고 안정된다. 하나의 정당이 아니라 여당과 야당으로 구성된 정당 정치의 구조가 안정되고 부흥한다.

우리가 IMF를 벗어날 때, 아르헨티나는 지불불능과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어떻게? 아르헨티나에는 선거 때마다 새로운 정당이 만들어졌다. 부패한 정치가들이 새로운 유토피아를 약속하기 위해서는 신당 창당이 불가피했다. 신당은 정권을 잡는 즉시 부를 축적했지만, 부끄러운 부자들은 정직한 빈자를 돌보지 않았다. 이것이 정치적 몰락의 대표적 시나리오다.

이번에도 정치적 이합집산의 틈새시장에서 대통령은 나올 것이다. 어쨌든 대통령은 정당의 거울이요, 정당은 국민 개개인의 거울이다. 거울 저편에 못난 대통령을 욕하게 될 순간이 오면, 먼저 거울 이편의 정당을, 결국 유권자 자신의 얼굴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유권자는 정당에 채찍과 당근을 배분하는 권리뿐만 아니라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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