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투성이 사회안전망

입력 2002-11-28 12:12:00

잇따르는 자살, 우울증 어머니에 의한 자녀 살해 등 사회병리적 문제들이 곳곳에서 불거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이에 대처하는 안전망이 제대로 구축되지 못해 사실상 무대책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안전망에의 기대 = 대구 서구 주민건강 증진센터 2층 정신보건센터에서는 20여명의 정신장애인들이 주간 재활교육과 직업 재활교육을 받고 있다.정신분열 증세로 14년간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는 안모(34.노원동)씨는 "병원이나 집에만 있을 땐 오히려 신경이 날카로와졌지만 여기서 6개월 정도 교육받으면서상태가 많이 호전되고 있다"고 했다.

주간 재활교육 3개월 과정을 끝마치고 직업 재활교육을 시작했다며 쇼핑가방 끈 만들기에 심취해 있던최모(47.비산동)씨는 "정신분열 증세로 6년여간 병원 신세를 졌지만 여기서 직업재활 교육을 받으며 자신감도 얻었고 목표의식도 되찾게 됐다"고 기뻐했다.

아들이 정신분열 증세를 20여년째 앓는다는 김모(74.칠성동)씨는 "교육 시작 후 아들이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며 "삶의 목표를갖게 된 것 같아 한시름 놓인다"고 했다. 역시 아들이 같은 증세로 15년째 치료받고 있다는 임모(64.봉덕3동)씨는 "정신장애인들이 정상적인 삶으로돌아갈 수 있도록 사회가 따뜻한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센터에서 만난 정신장애인 가족 대부분은 이런 교육이 삶의 의욕을 되찾게 하고 사회 적응에 대한 기대감도 높인다며 "재활기관 확충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같은 시설의 '노인교실'에서 만난 유상규(82.대구 비산2동) 할아버지는 지난 주부터 단전호흡.종이접기.발맛사지 등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데라도 나와야 숨을 쉴 것 같아. 놀이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거든". 이마에 땀이 맺혔지만 할아버지에겐 생기가 넘쳤다. 박추근(78.평리5동) 할머니는 "하루 몇시간 안되지만 이런 프로그램이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 먼 길 = 정신 건강 악화로 인한 자살 사고가 잇따르자 정부는 1997년 '정신보건법'을 만들고 정신질환 예방 업무도 국가 임무에포함시켰다. 이에따라 대구 경우 1999년에 서구.수성구에 '건강증진센터' '정신보건센터'가 설립되고 안전망 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금.인력 부족으로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서동우 박사는 "선진국에서는 이미 정신보건센터가 활성화 돼 자살 가능성 있는 사람들을 조기 발견해 체계적으로 치료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선 예산.인력 부족으로 운영조차 어렵다"고 안타까워 했다. 서구 주민건강 증진센터 경우 간호사.물리치료사.기능직 각 1명 등 종사자가 7명에 불과하다.

정신보건센터 정철호 박사는 "대구에만 1만여명의 정신장애인이 있지만 센터가 도울 수 있는 인원은 한해 500여명에 불과하다"고 했다. 센터 관계자는 "우울증을 가진 교육생이 상태가 호전되다가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자살한 경우도 있었다"며, "등록자 240여명을 3명이 전담하다보니 제대로 지원이 안된다"고 했다.

서구청 임재홍 건강증진 담당도 "예산.인력 부족으로 갑작스런 실업이나 주식투자 실패 등으로 자살 위험도가 높은 사람들에 대한 체계적 관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노인교실 역시 1만8천여명에 이르는 서구의 노인(65세 이상) 중 겨우 600여명만 맡을 수 있는 실정이다.

◇또다른 사회안전망 '민간봉사단' = 정부보다는 시민단체들이 먼저 이런 문제에 대처하기 시작해 역사가 이미 수십년 된 경우도 있다.대구시내에서 활동 중인 상담전화는 줄잡아 140여개. '도움은 전화처럼 가까운 곳에'라는 슬로건 아래 1985년부터 24시간 상담 활동을 벌이고 있는 대구 '생명의 전화'(475-9191)는 17년째 위기의 시민들을 돕고 있다.

부부 갈등, 성, 청소년 문제 등 전반을 상담하면서 자체 사회복지관까지 열어 복지.직업안내 등 활동도 벌인다. 하지만 이들의 사정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국가 지원 및 관련 기관과의 연계성 부족으로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고 관계자들은 말했다. 생명의 전화 박혜자 상담과장은 "민간단체가 구성한 사회안전망은 아무리 촘촘해도 한계가 있다"며 "상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국가 지원이 절실하다"고 했다.

상담자가 수면제를 과다 복용했음을 알았을 경우 즉시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도록 해야 하지만 시민단체 힘만으로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 선진국에서는 국가 지원으로 각 상담 전화에마다 위치추적 시스템을 설치하고 경찰.소방과 네트워크를 구성, 위급할 경우 함께 대응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상담자가전화를 끊어버리면 아무 대책을 세울 수 없다고도 했다.

그래서 민간 조직 활동자들이 가장 아쉬워 하는 것은 통합 네트워크 구축. 서구보건소 추정자 정신질환 담당도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정신보건센터와 지역 시민단체가 유기적 협력체제를 갖고 있다"며 "지역민 전체가 참여하는 사회안전망 구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선진국은 어떻게 하나 = 일반적으로 선진국의 사회안전망 프로그램은 전화.방문을 병행하는 모델로 24시간 전문 상담 단체들이 우리와 달리계획표에 따라 수시로 전화 접촉을 시도토록 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자살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한 1998년 민간단체에 거액의 자금을 지원해 '프리 다이얼'이라는 자살 예방 전화를 개설하면서 대대적 홍보와 함께 전문 봉사자 양성에 힘쓰고 있다. 호주 빅토리아주는 시민단체에 5년간 100만 달러를 지원해 자살 예방 센터 홍보 및 봉사자 교육을 진행 중이다.

이탈리아는 사회 통합 안전망으로 텔리헬프(Tele-Help)와 텔리체크(Tele-Check) 시스템을 도입했다. 텔리체크 시스템은 훈련된 이웃들이 위험도 높은 다른 이웃에게 일주일에 두 번 가량 전화로 접촉해 면담을 실시하는 것.

텔리헬프는 위험에 처한 사람이 알람 신호를 보낼 경우 즉각 도움 받을 수 있도록 고안된 것으로 우리의 119 페이징 시스템(홀몸노인 등이 긴급시 단추만 누르면 119에서 곧바로 도울 수 있도록 한 것)과 유사하다. 페이징시스템 경우 일본에는 1984년 도입했지만 우리는 2000년에야 시범 도입함으로써 현재 대구 전역 보급 대수가 3천대에 불과하다.

◇원스톱 시스템 = 우리나라도 이 부문 대응력이 너무 취약하다는 지적에 따라 보건복지부는 2000년 관련 정부기관 및 민간단체들을 네트워크한'원스탑 시스템'을 여성 긴급전화 1366에 도입했다. 이는 전화 받는 상담원이 내용에 따라 버튼 하나만 누르면 즉시 관련 전문기관으로 연결되도록 한 체계.

하지만 대구 1366과 연계된 34개 민.관 단체 중 24시간 운영되는 곳은 119.112.혜림원.대구의료원.가톨릭여자기술원 등 12개에 불과하다. 또 어린이를 위해 24시간 운영되는 전화 상담은 아동학대예방센터(1391), 동방사회복지회 아동상담소 밖에 없다. 소년소녀 가장, 결손.결함 가정 어린이 등을 위한 네트워크가 부족한 것. 노인.장애인에겐 아예 전문 핫라인조차 전무하다.

이상준기자 all4you@imaeil.com

문현구기자 brando@imaeil.com

도움말 =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서동우 박사 △대구 생명의전화 박혜자 상담과장 △아동학대예방센터 이정아 상담팀장 △여성긴급전화 1366채종현 상담원 △대구 노인의 전화 도은정 사회복지사 △대구 종합복지회관 아동상담실 박선학 상담원 △혜림원 임선희 상담원 △대구 서구 주민건강증진센터김동권 정신보건 임상심리사 △대구서부소방서 박진석 구조.구급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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