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 영세민들 '올해도 추운 겨울 나기'

입력 2002-11-26 00:00:00

80, 90평 짜리 아파트도 있다지만, 영세민들이 사는 공간은 넓어야 3, 4평이다. 그러나 그나마 편치가 못하다. 월세를 올려달라는집 주인의 성화에 시달리고 재개발 바람에 밀려 동네조차 통째로 사라질 위기에 있기 때문이다

대구 남산동 허름한 한옥의 3평 남짓한 방에서 75세의 할머니(우점순)와 둘이 사는 예림(가명.9)이에겐 요즘 학용품 살 돈이 없다. 연필.노트는 1, 2천원이면 살 수 있는 것들이지만 영세민으로 월 20만원밖에 지원받지 못하는 이 가족에겐 너무도 큰 돈이기 때문.

특히 겨울에는 보일러 기름값이 너무 부담스럽다. 월 평균 5만원의 방값에 기름값.전기요금을 주고 나면 겨울엔 항상 빈 손이다. 비만 맞아도 감기에 걸리고 조금만 피곤해도 코피를 쏟는 허약 체질이지만 예림이는 병원도 제대로 가 본 적이 없다.

예림이가 할머니와 사는 것은 5세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뒤. 4년째 두 식구로 살지만 예림이는 아침밥만 할머니와 함께 먹는다.점심은 학교 급식으로, 저녁은 인근 복지관에서 먹고 밤 9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일찍 와 봐야 뻔한 사정에 저녁을 제대로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림이네 3평 짜리 방에는 10년도 더 된 TV, 고장난 냉장고, 선풍기, 낡은 옷장이 있다. 그러나 예림이의 책상은 없다. 놓을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예림이는 근래 할머니 얼굴의 근심을 알아챘다. 이 동네가 재개발 된다는 것이었다. 10달에 50만원을 주고 사글세로 사는 이곳을 나가면 마땅히 갈 곳이 없다.

그래서 할머니는 밤마다 눈물을 말릴 새가 없다. 4년 전 예림이를 맡을 때 할머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무살까지 반듯하게 키워 놓으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이 집에서 쫓겨나면 자신은 양로원으로, 예림이는 고아원으로 가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 할머니는 "끼니조차 제대로 못 챙겨주지만 밝게 자라나는 예림이를 보면 그래도 힘이 났다"며, "하루에 1, 2끼만 먹어도 좋으니 집 걱정만 없으면 좋겠다"고 했다.성철근(55)씨는 대구 대현2동 '감나무골'에 산다.

지은지 50년 된 낡은 집 2평 공간이 그의 보금자리. 동네는 재개발로 철거를 앞두고 있다. 수백 가구가 떠났지만 성씨는 갈 곳이 없다. 전기도 끊겼다. 골목길 가로등에서 전기를 따 와 쓴다.

성씨는 10년 전 뇌수술을 받은 뒤 직장도 가정도 잃었다. 경비원.빌딩청소일 등을 하면서 겨우 버텨왔지만 최근엔 수술 후유증이 심해져 일을 할 수 없다.얼마 전엔 청소일을 하다 기절까지 했다.

숨도 쉬기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기초생활 보호 대상자도 아니다. 주민등록이 말소돼 보조금 받을 자격이 없기때문이다.

성씨는 요즘 고철.폐지를 모아 하루 1천원 남짓 번다고 했다. 많이 벌어야 2천원. 밥은 이웃에서 얻어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성씨는"영세민 동네는 인심이 좋다"고도 했다. 하지만 감나무골 철거가 시작되면 성씨는 노숙을 떠나야 할 판이다. 재개발 회사측은 오는 28일까지 스스로 떠나도록 요구하고 있다.

감나무골에는 아직 20여 가구가 남아 있다. 그러나 사정이 모두 성씨와 비슷하다. 대부분 1, 2평 짜리 단칸방에서 혼자 사는 노년층. 대부분 난방비가 없어 찬방에서 잔다고 했다. 이들은 "갈 곳이 없어 떠날 수 없다"고 했다.

문현구기자 brando@imaeil.com

이창환기자 lc156@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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