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 하는 오후

입력 2002-11-20 15:05:00

하얀 어둠을 잘라내고 맑은 유리구슬을 끼웠어

사랑했던 일들도

미워했던 일들도

모두 벗어버리기로 했어

그러자

세상은 모두 무지개를 걸어두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어

하룻밤의 환상이었던가

날이 밝자

삶의 흔적들이 얼룩진 채 모습을 드러내고

너무나 선명한 먼지들

주름진 모습들에

나는 다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어

눈 감아버리고 싶을 때가 더 많아졌어

점점 세상이 두려워졌어

백내장을 앓는 날보다

더욱더 무기력해지는 나날이었어

아!

아름다운 시절이여

그리운 나의 백내장이여

-전성미 '백내장'

▧백내장을 잘라버리고나면 세상이 모두 무지개를 걸어둔 것처럼 아름답게 빛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그러나 그 기대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서 이 시는 성립한다. 전복적 상상력! 맑은 두 눈으로 보기에 이 세상 삶의 흔적은 얼룩이 너무 많다. 먼지조차도 지나치게 선명하게 보인다. 맑고 깨끗한 눈이 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은 역설이고, 인생은 이 역설 위에서 성립한다는 것을 이 시는 주장하고 있다.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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