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대구 방촌동 주부들 1년째 품앗이 공부

입력 2002-11-04 14:29:00

문 꼭꼭 걸어 잠그고 학교간 아이와 출근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여자들. 그들의 일이란 청소 빨래 설거지 식사준비…. 게으른 하품과 불만만 늘어간다. 학창시절 배웠던 것들은 써먹을 기회가 없다. 종일 집안에서 맴도는 이 시대 아파트 주부들의 보통모습이다.

대구시 동구 방촌동 영남 네오빌 7명의 주부들은 이 따분한 일상에 반기를 들었다.1년쯤 전부터 1주일에 2번 영어공부를 시작한 것. 공부가 목적은 아니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르는 아파트의 벽을 허물자는 것이다. 빈손으로 모이면 수다떨고 똑같은 불만만 늘어놓을 게 뻔했다. 그래서 영어 책을 들었다.

31세부터 38세까지인 이 주부들은 1주일에 2번, 각자의 집을 번갈아 가며 공부방으로 삼는다. 엄마들이 공부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또 저희들끼리 까불고 웃고 운다. 그러다가 심심해지면 쪼르르 엄마들한테 달려와 흉내를 낸다. 3,4세의 이 흉내쟁이들은 초등학생 수준의 영어를 너끈히 해낸다. '영어가 너무 재미있다'는 아이들의 반응은 공부하는 엄마들이 얻은 덤이다.

주부들의 학습교재는 'TV영어 회화'. 수업을 위해 예습은 필수다. 그렇다고 겁먹을 건 없다. 텔레비전을 좀 더 신경 쓰며 보면 된다. 자신 없다 싶으면 입으로 중얼중얼 따라 해보고 공부방에 출석하면 된다. 사실은 '달달 외워야'할 때도 있다.

1년쯤 이웃의 엄마와 아이들이 정기적으로 한자리에 모여온 이 아파트엔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우선 지루하던 하루가 짧아졌다. 남편 출근하고 큰 아이 학교나 학원 보낸 후 주부들에게도 갈곳이 생겼기 때문이다.

살림기술도 늘었다. 특기 하나씩만 나눠도 7개가 되기 때문이다. 급한 일이 있을 땐 아이를 맡겨 놓을 수도 있다. 아이들도 제 또래의 친구가 있는 집, 자주 가던 집인 만큼 즐겁다.

집안의 큰 행사 땐 멀리 있는 동서보다 백 배 낫다. 얼마 전 박영선 주부의 시어머니 생신 땐 우르르 달려가 축하를 해줬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친구들과 아이들이 몰려오면 국수를 정성껏 밀어놓고 자리를 비켜준다. 주말부부로 심드렁해하던 며느리가 부쩍 밝아져 찾아오는 이웃들이 반갑기만 하다.

나이와 함께 축축 늘어지던 일상에 기분 좋은 긴장이 생긴 것도 변화. 예습을 않으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품을 쏟아 내거나 낮잠으로 낭비할 시간이 없다.

남편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남홍숙씨의 남편은 늦은 밤에도 서점에 나가 책 사오기를 마다 않는다.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본 좋은 영어 표현을 프린트해 갖다 줄 정도다. 공부하는 아내가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기 때문이다. 류일옥씨의 무뚝뚝한 남편도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타인에게도 나와 똑같은 영혼이 있음을 알게 됐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콘크리트로 된 이 삭막한 아파트에서 이웃사촌이라는 푸른 식물을 키워냈다는 것이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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