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에세이-복 많이 받으시오

입력 2002-11-02 00:00:00

일요일 햇살이 눈부시다. 오전동안 빈둥거리다가 최근 손대기 시작한 카메라를 둘러메고 나가 본다. 보훈병원 옆 도원동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자그마한 저수지가 예쁘다. 대충 셔터를 눌러대다가 백화점 쪽에 볼일이 좀 있는 걸 늦게서야 기억한다. 백화점의 화려한 진열대가 잡기에 따라서는 그림이 좀 될 것도 같다.

그러나 조금 망설여진다. 운동화에 점퍼에다 벙거지까지 눌러쓴 꼴로 백화점 문을 들어서기가 어쩐지 민망스럽다. 그러나 내가 누구냐. 점잖게 넥타이까지 매고도 입이 당기면 포장마차에서 어묵이나 떡볶이를 거리낌 없이 먹어대는 중년의 뻔뻔남이 아니냐- 밀고 들어간다.

그러나 그런 몰골로 카메라를 들이대면 일하는 아가씨들이 아무래도 좋아할 것 같지가 않다. 하는 수 없이 필요한 물건이나 하나 사고 내친김에 위층 전시장을 둘러보고 나온다.

아름다움 옆의 서러움

오후 세시 반. 햇살은 이미 반쯤 기웃하다. 배가 출출하다. 백화점 전문식당이 호화롭게 즐비하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후줄근 하게 시작했으니 끝도 그렇게 맺는 것이 옳다. 백화점 옆 분식집으로 들어선다. 냉면을 하나 시켜놓고 창 밖을 내다본다.

조금씩 기울어가는 늦가을 오후 햇살은 여전히 낭랑하고 그 아래 조금은 거들먹거리며 엎딘 도시는 아늑하고 고즈넉하다. 그 햇살 속에 나도 함께 녹아드는 느낌이 평온하다. 도시가 아름다워진다. 그러나 무슨 연유로 항상 아름다움 곁에는 서러움이 한 뼘씩 기대어 있는 것일까?

창 밖을 내다보던 내 시선이 무엇인가를 따라간다. 회색 바랑이 낮게 꿈지럭거린다. 그리고 벗어진 대머리가, 굽은 등이, 가냘프고 힘줄 선 노인의 목이 드러난다. 언제 왔는지 노인은 백화점 옆 거리에서 구걸을 한다. 굽은 등을 더욱 굽히고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갠 채 사람들의 옆구리를 따라 다닌다. 정수리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있다. 노인은 한참을 걸었을 게다. 기운 햇살아래 가을의 여자와 남자들은 열이면 아홉이 도망가듯 노인을 스쳐간다.

냉면이 나온다. 한순간에 해치운다. 몇 젓가락 냉면이야 3분이면 끝나지만 노인이 내 냉면을 바라보지 않았으면 하고 나는 흘낏거린다. 계산을 하고 나오니 노인은 여전히 그 주변을 서성거린다.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노인의 손에 쥐어주고 간다. 큰돈이 아니다. 내가 노인의 손을 훔칠 만큼 큰돈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나는 재빨리 노인의 손을 잠시 잡았다 놓는다. 마른 뼈와 거친 피부의 느낌이 선명하다. 또한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 노인도 분명 잠시 내 손을 잡았던 것 같다. "복 받으시오".벌써 두어 발자국 멀어지면서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가는 길 달라도...

가다가 보니 길이 반대방향이다. 하는 수 없이 되돌아온다. 노인을 스치면서 나는 또 그 소리를 들었다. 여전히 등을 구부린 채 노인은 내가 가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젊은 양반 복 많이 받으시오". 쉰 목소리를 짜내며 마음을 전달하려는 노인의 목소리를 나는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순간 냉면 속에 숨었다가 튀어나온 덜 풀어진 겨자 덩어리 같은 것이 휘익 목 아래를 지나간다. 울고 싶어진다. 복 많이 받으시오.... 고맙수다도 아니고 복 많이 받으시오 라고.... 노인의 말이 조금씩 커다라진다. 거부하기 어려운 어떤 지시 같기도 한 그 말이 가슴속에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 말은 이내 풋풋해진다.

노인의 그 무뚝뚝한 말씨가 듬직해진다. 정말 복을 듬뿍 받은 듯 홀가분하고 행복하다. 어떤 진지한 축복도 그렇게 듬직하지는 못했다. 이전에 다니던 그 장엄한 성당에서 신부님이 내리는 그 어떤 축복에도 나는 그렇게 행복하지 못했다. 의기투합하던 친구나 선후배들과의 만남에서도 그렇게 행복하지는 못했다. 그 짜내는 듯한 노인의 쉰 목소리 한마디에 내가 그렇게 행복해질 줄은 몰랐다.

한참을 가다가 뒤돌아서서 물끄러미 그 자리를 바라본다. 인파에 섞여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가을날의 햇살은 재빨리 그림자를 늘어뜨린다. 내게 그 말을 던질 때 노인의 마음속에 잠시 일었을 느낌을 생각한다. 노인을 생각하는 지금도 나는 행복하다. 그분도 그러하시기를....

김병준.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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